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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Jun 14. 2017

'내일'을 만드는 건 '희망'

영화 <하루>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가 제공한 시사회를 통한 영화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저 밤낮이 바뀐다고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쳇바퀴 도는 하루 하루의 반복일 뿐이다.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야 우리는 그 바퀴 속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간다.

 포스터에 '끝나지 않은 지옥에 갇혔다'는 문구를 보니 내가 가진 '지옥'에 관한 기억 중 가장 무서운 것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예닐곱 살때 들은 용암과 화염의 지옥은 비교도 되지 않는 그 공포감은 내가 세상에 막 발을 들여놓은 스물 세살 정도 무렵에 모습을 드러냈다. 날 그리도 예뻐하셨던 외할머니는 파킨슨 병을 앓고 요양원에 누워 계셨다. 몸은 점점 굳어가고 입까지 굳어가 말조차 제대로 하실 수 없으셨다. 엄마는 24시간 간병인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요양원에 할머니를 모시고도 매일같이 그 곳에 가서 다만 몇 시간이라도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할머니를 답답해하는 간병인의 눈흘김에 당신께서 눈칫밥을 드실까봐서 엄마는 매번 간병인에게 롤케익이나 빵 따위를 사들고가 연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셨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타서 엄마가 던진 한 마디가 귓전을 세게 때렸다.


"참, 다른 게 지옥이 아니라 이렇게 사는게 지옥인 것 같다."


 쾌유도 완치도 될 수 없는 병에 걸려, 물 달라는 말 한 마디 못한 채 누워있는 할머니와 매일 그런 당신을 돌봐야 하는 엄마. 엄마와 외할머니의 매일 하루 하루는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종류 중, 고통이 가장 극심하다고 알려진 곳은 무간지옥이다. 무간(無間),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끊임없는 고통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지옥이다. 엄마의 말을 들은 스물 세 살 때의 그 버스 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삶이 권태로워지면 삶은 어느 순간 지옥이 된다는 걸. 살아온 나이를 날짜로 따지면 거의 2만 번 의 하루를 맞은 엄마에 비해 나는 살아온 지 겨우 스물 세 해, 만 번도 하루를 겪어보지 않은 나는 아직 반복의 고통을 모른다는 걸. 그 때 엄마는 무간지옥 속을 헤매고 있다는 걸.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도 영화 속에서 무간지옥을 헤매인다. 한 사람은 딸의 죽음이, 또 한 사람은 아내의 죽음이 매일 반복된다. 영화 내내 이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막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한다. 좀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좁은 골목길을 누비고, 약속 장소를 바꿔보기도 한다. 사건이 고조될수록 처절해지는 이들의 노력에 관객들의 마음은 점점 답답해지고, 조여온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김명민, 변요한 두 배우는 적절하게 감정을 분출하고, 또 억제하며 끝없는 반복 속에 사랑하는 이들을 구할 수 없는 무력감을 잘 그려낸다.


 사실 이 두 사람은 하루가 반복되기 이전부터 무간지옥에 빠져 있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지침'이다. 뛰어난 의술과 인품으로 높은 명성을 얻은 의사 준영(김명민)은 밀려드는 일 때문에 사랑하는 딸과 점점 소원해져가는 하루하루에 지쳐간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한 앰뷸런스 운전수 민철은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아내의 요구와 생계 사이에서 하루를 버텨간다.  사회적 명망과 부에 관계 없이 하루는 두 사람 모두를 공평하게 지치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옥같은 세상을 버티고 살 수 있는 이유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일'은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내일을 낭만적인 말로, 긍정적인 말로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아이, 아내는 그들의 미래이고 그 '희망'을 상징하는 사람들이다. 하루하루 무럭무럭 커 나갈 딸을 바라보고, 지금은 생계 때문에 힘들지만 결국 아내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 거라는 그들의 희망, 그것이 무간지옥 속을 살아가는 그들의 갑옷이고, 방패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왜 끝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게 되었는가. 그건 바로 그들이 누군가의 '희망'을 앗아갔기 때문이었다. 앰뷸런스 운전수 민철은 강식과 아들 하루가 탄 차와 뺑소니 사고를 내고는 달아난다. 두 사람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어 하루는 뇌사 상태가 되고, 강식 역시 죽음의 문턱 앞을 서성인다. 심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 딸의 장기 기증자를 애타게 찾던 준영은 뇌사 상태의 환자가 병원에 찾아오자 가짜 이식 수술 동의서를 만들어 하루의 심장을 딸에게 이식한다. 하지만 죽을 줄로만 알았던 강식은 살아나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에게 세상은 진짜 무간지옥이다. 그의 아들의 이름은 '하루'. '하루'를 잃은 그의 하루를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강식은 어쩌다 맞게 된 반복되는 하루를 '복수'의 기회로 사용한다. 자신의 희망을 빼앗아간 이들의 희망을 뺏기로 한다.


 준영과 민철은, 이 반복이 한 남자의 '복수'에서 기인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복수'를 대하는 준영과 민철의 태도는 조금 다르다. 의사인 준영은 강식을 살려 지난 날의 과오를 사과하여 반복을 막아야 한다고 하지만, 민철은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강식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민철의 아내는 사실 이미 몸 속에 아이를 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민철은 더욱 분노하여 더 큰 복수의 감정 속에 사로잡힌다. 우여곡절 끝에 준영은 강식을 살려내는 데 성공하고, 용서를 빈다. 정말 미안하다고, 당신이라면 나처럼 하지 않았겠느냐고 울부짖는다. 그 때 강식이 하는 말은 자못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나라도 그렇게 했겠지. 그런데 당신이 나였다면, 당신은 나와 달랐을까?"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하루가 반복되도 난 네 딸을 죽일거야."

 

 강식의 말은 그의 몸에 사무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분노로 점철된 강식의 삶에 내일이란 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무간지옥을 세 사람은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감독은 이 삼각 구도를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가.

 결국 준영, 민철, 그리고 강식에게 다시 희망을 돌려주는 건 '하루'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통해 산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준영의 딸 은정은 하루의 심장은 내 몸 속에서 뛰고 있으니 난 하루와 함께 있는 거라고 강식에게 말한다. 어쩌면 강식은 계속해서 아들 '하루'를 죽여왔던 것이다. 계속해서 딸을 죽이려 함에도 강식을 살리고자 하는 준영에게, 강식은 왜 나를 살리느냐고 묻는다. 그 때 강식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죽이라고 하루가 반복되는 게 아니야. 당신 살리라고 하루가 반복되는 거지."


 그렇다. 강식의 아들 '하루'는 반복되는 하루를 통해 강식 앞에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잃고 무간지옥에 빠져 사는 강식을 구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내일이 없는 강식의 삶에 내일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복수'의 감정은 '희망'의 감정으로 바뀐다. 자칫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합리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차피 뇌사 상태로 남은 평생을 살게 될 하루와, 아이를 바라보고 있게 될 강식의 삶은 무간지옥 같았을테니, 과정이야 어쨌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강식은 은정을, 아니 하루를 부둥켜 안는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하루의 의미를 알게 해 준 아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준영은 자신의 잘못을 자수하고, 민철은 아이의 이름을 '하루'라고 짓기로 하며 죽은 아이 하루에게 용서를 구한다. 감독은 아마 결말을 통해 관객들도 영화 내내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복수와 분노의 감정을 벗어던지고, 희망을 바라보기를. 내일이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만약 엄마가 사는 게 지옥같다는 말만 내게 남겼다면, 아마 그 때부터 내게 삶이란 '우울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엄마는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그래도, 너희들 덕분에 내가 산다."

 

 엄마는 무간지옥 속에서 나와 동생이라는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계셨던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하루하루의 반복 속에서 자식은 엄마의 내일이었던 것이었다. 영화를 보며 새삼 엄마에게 자식이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하게 된 그 날을 떠올렸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영화 속의 세 남자처럼 내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저 밤낮이 바뀐다고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쳇바퀴 도는 하루 하루의 반복일 뿐이다.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야 우리는 그 바퀴 속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그렇다면 강식이 마음을 고쳐 먹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면, 이들의 삶은 다시 또 반복될 것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조차도 내가 벌써 희망없는 내일을, 희망없는 미래를 상상했음을 깨닫고 조용히 그 생각을 접어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은 또 어떤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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