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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Jun 29. 2017

옥자를 살려 주세요

영화 <옥자>

 지금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간은 새벽 두 시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는 29일 00시 00분 00초에 넷플릭스와 극장을 통해 동시 개봉했다. 121분의 러닝타임이 끝나고 난 뒤, 나는 극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 방 의자에 앉아 창을 하나 종료시킨 후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컴퓨터를 통해 개봉과 동시에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니, 불법 다운로드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스크린의 93%를 점유한 거대 멀티플렉스인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가 넷플릭스가 통상적인 관례로서 극장 개봉과 온라인 상영 사이에 시간을 두는 이른바 '홀드백' 기간을 가지지 않고 동시에 개봉하는 것을 트집 잡아 <옥자>를 보이콧했다. 통상적으로 온라인 상영 전에 3주 정도의 기간을 둬서 극장의 수익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보이콧의 골자다. 관객도 노트북으로 바로 만나는 개봉 영화가 좋으면서도 어색했는데, 인기 감독인 봉준호의 세간의 주목을 받는 신작으로 큰돈을 벌 기회를 놓친 멀티플렉스들도 눈 앞에 닥친 상황이 매우 어색했나 보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일까 생각해 보며, 멀티플렉스들의 보이콧 기사를 다시 읽다가 난 그 이유를 알았다. 영화 <옥자>를 둘러싼 넷플릭스와 멀티플렉스 갈등과 잡음에 대해 '옥자'가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잉 그거 산에다 그냥.. 풀어놓은 거여.


 육류 가공 기업 '미란도'의 '슈퍼 돼지 프로젝트'에 의해 10년간 돼지를 위탁받아 키우게 된 희봉. 10년 동안 슈퍼 돼지 '옥자'를 건강하게 키워낸 희봉(변희봉)에게 죠니 윌콕스 박사(제이크 질렌할)가 그 비결에 대해 묻자, 희봉은 그저 산에다 풀어놓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사실 옥자는 희봉이 키웠다기 보단 희봉의 손녀 미자(안서현)와 함께 자랐다. 그곳은 뉴욕도, 서울도 아닌 'Far From New York'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찾는 이 모두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는 첩첩산중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옥자는 건강할 뿐만 아니라 어찌나 똑똑한지 본능적으로 도르래의 원리를 깨친 돼지다. 희봉이 '우리 두 식구'라고 말할 때마다, 꼭 '세 식구'라고 정정하는 미자에게 옥자는 가축이 아닌 동생이다.

 그러나 죠니 윌콕스 박사와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기획한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로 대표되는 기업 미란도에게 슈퍼 돼지의 가족과 이름은 중요치 않다. '옥자'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도 중요치 않다. 돼지 복지를 위해 그런 것을 묻는 게 아니니까. 그들에게 옥자는 그저 원재료일 뿐이다. 양질의 원재료를 얻기 위한 비결로서 옥자가 자란 환경이 중요하다. '옥자'는 미란도가 기획한 '슈퍼 돼지 콘테스트'의 '슈퍼 돼지'로 선정되고 뉴욕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옥자를 탐욕스러운 거대 자본으로부터 되찾기 위한 미자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산골에서 서울로, 그리고 뉴욕으로 영화의 장소들은 더욱더 자본주의 논리가 진리로 숭상받는 곳으로 옮겨간다. 옥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대중에게 노출된 미자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미란도 그룹은 이를 이용하기 위해 그녀를 극진히 모셔 미국으로 데려오고자 한다. 미자와 옥자를 '슈퍼 돼지 콘테스트'의 대중 앞에서 재회하도록 해 좋은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옥자야! 옥자야!


 이 영화에서 미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이 순박한 시골 소녀가 한 번도 꿈꾼 적 없는 일등석 비행기와 좋은 옷, 세간의 관심을 받으면서도 원하는 것은 오로지 '옥자'와 함께 집에 돌아가는 것뿐. 미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옥자뿐이다. 영화 막바지에 미자는 도살 직전의 옥자를 찾아내고, 미란도 그룹과 다시 조우한다. 옥자를 살려달라는 미자의 애원에도 자신들은 산 것이 아닌 죽은 것만 판다며, 재산인 '옥자'를 어떻게든 도살하려 하는 미란도 그룹의 마음을 바꾸는 것도 결국 '거래'고 '돈'이다. '옥자'의 가치에 준하는 돈을 받자마자 미란도의 태도는 180도 변화한다. 산 것을 팔 수 있게 된 그들은 당연히 더 높은 효용을 찾아 거래에 응한다.



여기서 '옥자'에는 영화 <옥자>, '미자'에는 관객, '미란도'에는 멀티플렉스를 대입해 보자. 그렇다면 여러분도 영화 <옥자>를 둘러싼 작금의 사태에 대한 옥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멀티플렉스들은 극장과 넷플릭스의 동시 개봉이 영화 생태계를 어지럽힌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그저 자본이자 홍보 수단으로써 슈퍼 돼지 '옥자'를 이용하려는 거대 기업 미란도와 다를 바 없다. 도대체 무엇이 생태계를 어지럽히는가. 그들이 말하는 영화 생태계의 순리로써 한번 생각해보자. 영화 <옥자>는 넷플릭스의 제작비 투자를 통해 만들어진 영화다. 넷플릭스 회원들이 낸 돈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런 콘텐츠를 넷플릭스가 개봉할 권리는 얼마든지 있다. 멀티플렉스들은 '옥자'를 보이콧 함으로써 넷플릭스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이 '옥자'를 볼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소 극장들의 <옥자> 상영만으로 <옥자>가 예매율 2위를 달리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멀티플렉스들은 철저히 '돈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인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넷플릭스도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 제작비를 투자한 것은 순수한 예술 진흥의 목적이라기보다는 봉준호 감독의 국내 인기에 기대어 국내 가입자 수를 늘리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자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영화 산업은 이렇게 경제의 순리에 의해 움직여질 수 밖에 없다. 영리 기업들의 영리 추구를 어찌 나쁘다 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면으로만 이해하기에 멀티플렉스들의 보이콧은 도가 좀 지나치다. CGV나 롯데시네마는 자사가 배급한 영화를 노골적으로 밀어주고, 거대 자본의 논리로 창작의 힘을 그들의 영향권 안으로 몰아넣는다. 영화는 멀티플렉스와 같은 거대 기업에게 예술이 아닌, 수익이 나오는 원재료일 뿐이다. 영화 <옥자>의 선례를 통해 창작자들이 더 다양한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면, 예술적 다양성의 측면에서 영화 생태계는 풍요로워질 것이다. 멀티플렉스들이 말하는 영화 생태계는 생태계가 아니라 돼지들을 죽이고, 고기를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공장과도 같은 것이다.

 넷플릭스도, 멀티플렉스들도 이는 밥그릇 싸움을 할 일이 아니라, 그저 소비자들의 선택에 맡길 일이다. 생태계의 순리에 맡겨야 한다.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즐기고 싶은 관객이라면 극장으로 달려갈 것이고, 집에서 소소하게 감상하고 싶은 관객이라면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를 감상할 것이다. 이러한 멀티플렉스들의 움직임은 극중의 거대 기업 미란도의 자본을 앞세운 횡포처럼 영화 생태계를 오히려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옥자를 빼앗아가려고 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나는 영화는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영화는 살아있어야 한다. 극장들도 죽은 것을 파는 게 아니라, 살려서 키워내야 한다. 영화 마지막에서 미자는 수많은 슈퍼 돼지들 중 '옥자'만을 구해냈을 뿐, 다른 수많은 돼지들은 도살장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티플렉스들이 극단적으로 그들의 이익만을 좇는다면, 그들과 한 계열에 있는 배급사의 영화나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영화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는 수많은 좋은 영화들이 죽게 되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무엇인가가 살아남고, 무럭무럭 자라나려면 거대 자본의 인위적이고 철저한 사육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산에다 풀어놔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옥자>의 개봉을 보이콧한 93%의 스크린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제발 옥자를, 돼지들을 죽이지 말아달라. 우리의 영화가 공장이 아닌, 생태계가 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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