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운전사>
*본 영화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슈퍼 히어로들의 공통점은 뭘까. 이름이 없다는 것 아닐까. 본명은 숨긴 채 조금은 유치할 수도 있는 가명을 사용해 세상을 구하는 영웅들. 영웅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게 아니라는 듯이.
-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친구 정대의 시신을 찾기 위해 상무관을 찾은 어린 소년 동호는 친구 정대와 형, 누나, 아저씨, 아줌마들이 왜 '대한민국의' 군인들의 쇠 박힌 몽둥이를 두들겨 맞았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의 총칼에 죽은 이들의 추도식에 흘러나오는 애국가와, 그들의 관을 둘러싸고 있는 태극기를 동호는 이해할 수 없다.
지도 모르겄어요. 군인들이 우리한테 왜 이러능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만섭(송강호)이 도대체 군인들이 사람들을 왜 두들겨 패는지 재식(류준열)에게 묻자 재식은 말한다. 모르겠다고.
그렇다. 1980년 5월, '화려한 휴가'를 즐기던 군인들에 의해 광주에서 죽어간 사람들조차, 죽음을 목도한 사람들조차도 왜 그들이 죽어야하는지 몰랐다. 밖에 있는 우리는 더더욱이 몰랐다. 하루하루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느라 바빴을 우리들에게 신문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전화도, 통행도 모두 차단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이 작은 땅덩어리에 오밀조밀 모여 살면서도 아무 것도 몰랐다.
무섭도록 끔찍했던 그 날의 참상을 우리에게 알린 건 어느 '푸른 눈의 목격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아직도 광주 폭동이라 부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누군가는 숨겨야 하는, 하지만 결국 모두가 알아야 할 사실을 목숨 걸고 우리들과 전 세계에 전한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와, 뜨거웠던 1980년의 대한민국 광주에서 그가 목격한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조용필의 명곡 '단발머리'를 흥얼거리며 손님을 찾는 서울의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만섭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데모하는 대학생들 때문에 부서진 백미러에 벌벌 떨며, 일찍이 아내와 사별하고 딸과 둘이서 셋방을 얻어 산다. 주인집 아들에게 맞고 다니는 딸을 보고도 사글세가 밀려 있는 탓에 주인집에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런 만섭에게 돈 한푼 벌 줄 모르면서 군인들 무서운 것까지도 모르는 학생들의 데모는 철없는 행동일 뿐이다. 이렇게 먹고 살 수 있으면 된 것이지, 입에 풀칠하기도 빠쁜 세상에 민주화란 말은 만섭에게 먼 나라의 이야기이다. 그런 만섭에게 들려온 광주까지 태워다주면 거금 10만원을 주겠다는 어느 '호구' 외국인 기자의 얘기. 기사식당에서 우연히 들려온 이 대화를 엿들은 만섭은 국도극장 앞에서 손님 피터(위르겐 힌츠페터)를 가로채 광주로 향한다.
광주로 들어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군인들이 막아 놓은 통에, 어렵사리 광주로 들어온 만섭과 피터는 위험에 직면한다. 만섭은 몰랐다. 광주가 데모와 시위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위험한 곳인지. 그렇기에 광주 민주화 운동을 대하는 만섭의 첫 감정은 역시나 '철없음'이다. 왜 괜히 나랏님을 들쑤셔서 팔자에도 없는 개고생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사우디에서 배운 짧은 영어로는 피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다. 너무 위험한 곳까지 들어와버렸다고 생각한 만섭은 피터를 버리고 광주를 빠져나가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만섭은 결국 광주를 빠져나가는 데 실패하고, 피터와 시위대들을 다시 만난다. 게다가 만섭은 피터의 필름가방을 훔쳐 달아났다고까지 오해를 받는 상황. 크게 실망한 피터는 서울에 돌아가면 주기로 한 택시비를 내밀며 혼자 서울로 돌아가라고 한다.
"야, 내가 지금 돈 달라 그랬어?"
만섭은 다짜고짜 돈을 내미는 피터의 멱살을 쥐며 격분한다. 만섭은 혼자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딸을 걱정하고 있었다. 택시가 고장나 서울로 갈 수도 없는데, 시외전화가 모두 끊겨 딸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만섭은 단순히 '돈'에 미쳐 살아가는 황금 만능주의적인 인간이 아니다. 하나뿐인 금지옥엽 소중한 딸을 예쁘게 키우기 위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이 돈일 뿐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 했던가. 딸과 함께하는 단란하고 소소한 생활을 위해 만섭에게,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그 당시의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께 가장 중요했던 건 돈이었다. 가족을 위해 사우디의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돈을 번 끝에 한국에 돌아온 만섭은, 대한민국같이 살기 좋은 곳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데모를 하는 청년들을 철없고 한심하게 바라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광주의 택시기사 태술(유해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만섭과 피터. 둘은 함께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일들을 함께 목격하게 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만섭과 피터가 광주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게 된 재식(류준열)과 일행들이 탄 트럭. 광주 사람들은 억울한 탄압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 피터는 재식 일행을 취재하기 위해 그들의 트럭에 올라타고, 청년들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른다.
<훌라송> 이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는 실제로 70년대 초중반 데모 현장에서 자주 불렸던 노래다. 이 노래는 광주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광주 사람들 서로에게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만섭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의 '철없는 문제아들'이 아니라, 부당하게 총칼을 들이대는 군인들에게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려는 '영웅'이었다.
만섭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비굴해지고, 돈 때문에 한 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이었기에 처음엔 광주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광주 택시 운전수들은 택시비도 받지 않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병원으로 실어날랐고, 주유소에서는 '만땅 같은 3000원' 대신 거저 만땅을 채워 주었다. 서울에서 오신 기자 양반과, 그 기자 양반을 광주까지 데려와준 고마운 택시 운전사에게 광주 사람들은 욕본다며 보따리에 싸온 주먹밥을 선뜻 내밀었다.
자신의 가족과 친구, 이웃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에 만섭의 시선도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한다. 특히 재식과 태술의 용감하고 의로운 행동은 만섭에게 큰 잔상을 남긴다. 사복 형사들에게 쫓기다 체포되어 모든 필름을 뺏길 위기에 처한 만섭과 피터, 그리고 재식. 재식은 사복 형사들에게 잡혀 인질이 된다. 그리고 열을 셀 동안 건물에 숨은 만섭과 피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총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다. 재식은 자기가 영어로 살려달라 피터를 설득해 보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제 목소리 들리시죠? 전 괜찮으니까 들리시면 어서 도망가세요. 그리고 바깥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재식은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만섭은 병원에서 한쪽 운동화가 벗겨진 채 싸늘하게 죽어 있는 재식의 시신을 바라보며 심경의 큰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어떻게든 재식, 그리고 재식과 함께 죄 없이 죽어간 이름 없는 영웅들을 위해 꼭 피터를 이 곳에서 데리고 나가리라 마음 먹는다.
그리고 태술과 광주의 택시운전사들 역시 빛고을의 영웅들이다. 공수부대가 거리의 광주 시민들을 향해 자비 없는 총구를 겨누던 그 때, 쓰러진 사람들과 그를 구하려는 사람들에게까지 총을 갈겨대던 그 때 택시 한 대로 날아오는 총알을 막아내며 사람들을 구한 건 태술과 광주의 택시운전사들이었다. 만섭은 이들과 함께 사람들을 구하러 택시를 몰고 총알을 온 몸으로 막아낸다. 이제 만섭은 백미러만 하나만 부러져도 오금을 저리던 소시민의 모습을 벗어던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만섭의 낡은 택시는 총을 맞는다. 타이어에 펑크가 나고 창문엔 구멍이 뚫린다. 하지만 만섭이 묻는 건 부상당한 사람들의 안위 뿐이다.
그리고 만섭과 피터의 마지막 광주 탈출을 도운 것도 태술과 그의 동료들이다. 집요하게 만섭의 택시를 뒤쫓는 사복 형사들의 차를 막아내는 것도 광주의 택시들이다.
"여기는 걱정하지 마시고!"
이 영화에서 태술과 재식은 모두,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다. 수 십, 수 백명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죽음의 이유조차, 하다못해 죽은 사람의 이름 한 줄 조차 방송도 신문도 말 한 마디 않는 이 현실. 태술과 재식, 그리고 광주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김포공항에 도착한 만섭과 피터. 둘은 과자 상자 속에 필름을 숨긴다. 피터는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을 함께한 만섭에 감사를 표하며 그의 이름과 전화 번호를 묻는다. 하지만 만섭은 이상한 번호와 '사복'이라는 가명을 피터의 수첩에 적어준다.
만섭은 김사복이 됨으로써 이름 없는 영웅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는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아마도 그는 감히 '만섭'이라는 두 글자 이름으로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의 영웅으로서 빛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소시민이니까. 명예나 부귀 영화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내 딸의, 내 가족의 행복을 바라는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섭은 딸을 다시 만난다. 하지만 이제 만섭은 예전과 같은 작고 평범한 소시민이 아니다. 어느 차가운 새벽 거리에서 택시비가 없는 학생에게 턱도 없는 돈만 받고도 집에 데려다주는 '이름 없는 영웅'이다.
사실 이 리뷰에서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위르겐 힌츠페터에 대한 언급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모두가 위험을 무릅쓰길 주저하던 그 때, 참상의 한복판에 뛰어든 '푸른 눈의 목격자'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영웅이며 그의 용감한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난 이 영화가 정말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위르겐 힌츠페터만이 실제 인물일 뿐, 그 외의 인물들은 가명이거나 모두 만들어진 인물이다. 아마도 장훈 감독은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위르겐 힌츠페터의 이름을 빌어 그 이름없는 영웅들을 조명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거리에서 정의를 외쳤던 시민들과 함께, 말 없이 그들을 도왔던 이름 없는 영웅들도 있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한줄도 싣지못
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5.20
전남매일신문기자 일동
최기자(박혁권)을 비롯한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목격한 참상을 싣기 위해 사장 몰래 신문을 발행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실패했어도 그들은 이름 없는 영웅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대도 '군경 1명 사망'만을 뻔뻔하게도 신문에 실어 내보내던 여느 기자들보다는.
그리고 외국인을 태운 서울 택시를 무조건 잡아들이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트렁크에 숨겨진 서울 택시 번호판을 보고도 만섭과 피터의 택시를 그냥 보내준 어느 군인. 모진 말을 해도 결국 혼자 남아있는 만섭의 딸을 잘 챙겨준 주인집 상구 엄마. 그 사람들 모두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동호는 태극기로 관을 감싸고 애국가를 트는 것이 궁금해 조심스럽게 은숙 누나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은숙 누나가 대답한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찌르고 때리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그렇다. 그들이 원망한 건 그들을 억압한 군부 독재 정권이었을 뿐, 대한민국은 그들이 지켜야 할, 그들이 사랑하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폭도가 아니라 영웅이다.
사실 재식은 '대학가요제'가 나가고 싶어 대학생이 된 철없는 20대였고, 태술은 만섭과 마찬가지로 하루 벌어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 당시 광주에 있던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부당함에 모두 '이름 모를 작은 빛'이 되어주었고, 이들이 모여 광주는 말 그대로, 빛이 흘러 넘치는 '빛고을'이 되었다. 전 세계에 진실을 알려준 어느 외국인 기자,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른 '정의파'들, 총알을 막으며 목숨 걸고 다친 사람들을 병원으로 실어나른 택시 운전사들, 그 외의 모든 이름 없는 영웅들이 발산해 준 빛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 주인일 수 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슈퍼 히어로들의 공통점은 뭘까. 이름이 없다는 것 아닐까. 본명은 숨긴 채 조금은 유치할 수도 있는 가명을 사용해 세상을 구하는 영웅들. 영웅에게는 이름이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된 위르겐 힌츠페터 씨에게, 그리고 하늘나라에 계시거나 이 땅 어딘가에 있을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