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코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음악은 '기회'가 아닌 '기억'이라고 영화 <코코>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떤 음악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노래에 가득 담겨 있는 '감정' 때문이다. 음악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의 노래에는 그런 '감정'이 담길 수 없다. 그런 이에게 음악이란 그저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기회이고, 수단일 뿐일 테니까. 음악을 통해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고, 그런 추억을 담아서 만들어진 음악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가사가 표현하는 음악에 담긴 이야기가 그 음악이 표현해내는 감정에 효과적으로 녹아들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그 노래가 듣는 이들 각자에게 '추억'이 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음악'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후 세계는 세상 어딘가 외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후 세계'란 결국 살아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다. 죽은 이들은 살아 있는 우리의 추억 속에서 숨쉬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죽어서 살아 있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세상에 많은 추억을 남겨야 할 테다.
한 해가 저물어감을 조금씩 체감하기 시작하는 11월. 멕시코에는 그런 11월의 첫 날과 둘째 날 치러지는 성대한 행사가 있다.
Dia de Muertos
영어로는 'Day of the Dead', 한국어로는 '망자의 날'이라 번역되는 이 날은 집집마다 재단에 사진으로 모셔 놓고 먼저 돌아가신 가족들의 영혼이 찾아 오기를 기다리는 날이다. 이 날이 되면 멕시코 사람들은 금잔화(Marigold) 꽃잎으로 제단(Ofrenda)까지 이어지는 길을 만들어 놓으며, 이 꽃길을 통해 조상들이 집을 찾아 온다고 믿는다. 그렇게 그들은 먼저 돌아가신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명복을 빈다. 멕시코인들에게는 한 해의 매우 성대한 행사 중 하나다.
영화 <고스트 스토리>의 리뷰에서도 한번 다뤄본 적이 있지만, '죽음'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한 주제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주제가 죽은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닌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일 테다. (죽은 이들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망자를 만나봐야만 알 수 있을테니까) 아마도 죽은 이들에게는 이미 '죽음'이라는 명제 자체가 '소멸'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이들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오롯이 살아있는 이들의 몫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이들은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기를 희망했고, 사후 세계를 창조해 냈다. 어렸을 적 난 그런 사후 세계의 존재 목적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막연한 두려움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아이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이었다. '기억'은 '감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특정한 시기에 떠올렸던 강력한 감정은,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고, 그것은 뇌 어딘가에 자연스레 자리잡아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하지만 죽은 이와는 더 이상 추억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망자가 없는 채로 세월이 지나고 빛이 바래진 기억은 '망각'의 단계에 접어 든다. 그래서 인간은 아마 죽은 이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멕시코 인들은 망자가 살아있을 때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어딘가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 그를 기억하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사진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언젠가 내 죽음이 다가온 이후, 나도 자손들에게 기억되기를, 그래서 나도 영원히 살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결국 죽음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이란,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테니까.
영화 <코코>는 그런 망자의 날에, 음악을 사랑하는 소년 '미겔'에게 일어난 신비한 일을 그리는 영화다. 영화 <코코>는 디즈니와 픽사가 가장 잘 하는, 동화적이고 신비한 요소들을 '현실적'으로 잘 버무려내는 그들 특유의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녹여냈다. 죽은 자들은 1년에 한 번 망자의 날에 저승에서 이승으로 넘어가기 위해 마치 공항 입국 심사대와 같은 곳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곳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권이 아닌, 제단에 올려진 망자 본인의 '사진'이다. 이승 어딘가에 그를 기억하는 이가 있어야만 이승을 향하는 금잔화 다리를 넘어갈 수 있다. 이렇게 디즈니와 픽사가 촘촘하게 만들어 낸 '사후 세계'는 약 1시간 40분정도의 러닝 타임동안 영화가 아닌, 실제 죽은 이들의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코코>의 주인공 '미겔'은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을 혐오하는 '리베라'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들이 음악을 싫어하는 이유는, 음악 때문에 가족을 돌보지 않고 꿈을 찾아 떠나버린 얼굴도 모르는 고조 할아버지 때문이다. 하지만 훌륭한 뮤지션이 되고 싶은 '미겔'은 꿈을 꺾으려 하는 가족들이 못마땅하다. 그런 미겔은 어느 날 재단에 올려진 고조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 할머니 코코의 사진 액자를 깨뜨리게 되고, 그 사진에서 우연히 자기가 사랑해 마지 않는 멕시코의 전설적인 가수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타를 발견한다.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가 자신의 고조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 미겔. 그리고 마을 광장에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동상에 새겨진 명언, '기회를 잡아라'라는 말은 음악을 향한 미겔의 열정에 불을 지핀다. 그리고 망자의 날 장기 자랑에 참여하기 위해 몰래 델라 크루즈의 무덤에 있는 고조 할아버지의 기타를 빌리려다 죽은 자들의 사후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리고 '미겔'은 우연히 죽은 자들의 도시에서 떠돌이 '헥토르'를 만난다. '헥토르'는 이승에 갈 수 없는 망자다. 어느 제단에도 그의 사진이 올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이승에 갈 방법을 찾다가 '미겔'을 만나고 '미겔'이 아직 살아있는 아이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헥토르'는 '미겔'이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를 만나러 가게 도와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사진을 제단에 올려달라고 부탁한다.
영화 <코코>는 '음악'과 '기억'의 상관 관계를 그린다.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에게 음악은 '기회'다.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기회'.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꿈을 위해 음악을 하던 소중한 친구 '헥토르'를 죽였고, 친구의 기타를 훔치고 친구의 곡을 훔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기회를 잡아라'라는 그의 명언은 처음에는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로 들리지만, 그의 본색이 드러난 이후에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말로 탈바꿈한다. 마치 음악의 장조와 단조의 차이처럼. 그리고 에르네스토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노래'를 통해 '세상 모두가 나의 가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헥토르'는 달랐다. 사실 미겔의 진짜 고조할아버지였던 '헥토르'는 물론 처음엔 꿈을 찾아 가족을 버렸다. 하지만 그는 가족의 사랑 없이 대중의 사랑을 얻은 들 아무 소용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이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의 딸 '코코'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다시 돌아가려다 에르네스토의 욕심 때문에 허망한 죽음을 맞았다. 제단에 사진이 없어 이승에 갈 수 없는 '헥토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승에 가고 싶었던 이유도 딸 '코코'가 보고 싶어서 였다. 이승에서 유일하게 그를 기억하고 있는 이는 '코코'였다. 하지만 너무 늙어버린 '코코'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고, 이승에 아무도 '헥토르'를 기억해주는 이가 없다면, 그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도 사라져버리는 이른바 '진정한 죽음'을 맞게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헥토르가 미겔의 고조 할아버지임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헥토르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해 줘>는 세상을 위해 만든 노래가 아니야.
내 딸 '코코'를 위해 만든 노래지."
'헥토르'에게 음악은 '기억'이었다.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를 멕시코 최고의 가수로 만들어 준 불세출의 노래 <기억해 줘>는 사실 헥토르가 딸을 위해서 만든 노래였다. 그렇게 가족을 사랑하고, 추억을 사랑하는 헥토르였기에 그는 알았을 것이다.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족의 사랑을 포기하고 대중의 사랑을 얻어 봐야 그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영화 <코코>에는 노래 <기억해 줘>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아마도 영화 내에서 멕시코 인들이 사랑하는 최고의 유행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 줘>라는 노래가 가진 진정한 힘은 수많은 관중이 가득 찬 무대가 아닌,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불려지는 과정에서가 아닌, '코코의 방'에서 드러난다.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점점 모든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미겔'의 증조 할머니 '코코'는 손주가 부르는 <기억해 줘>를 듣고 평생을 보고 싶어한 아빠, '파파 헥토르'의 기억을 되살린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젖은 마들렌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주인공처럼.
음악은 '기회'가 아닌 '기억'이라고 영화 <코코>는 말하고 있었다. 어떤 음악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노래에 가득 담겨 있는 '감정' 때문이다. 음악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의 노래에는 그런 '감정'이 담길 수 없다. 그런 이에게 음악이란 그저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기회이고, 수단일 뿐일 테니까. 음악을 통해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고, 그런 추억을 담아서 만들어진 음악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가사가 표현하는 음악에 담긴 이야기가 그 음악이 표현해내는 감정에 효과적으로 녹아들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또 그 노래가 듣는 이들 각자의 '추억'을 만들고 비로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음악'이 되는 것이다. 흐려져 가는 할머니 '코코'의 기억을 한 순간에 되살아나게 했던 그 한 곡의 노래처럼.
그렇기에 시대를 '초월'하는 음악이란 아마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만이 존재할 뿐. 흘러간 시절의 옛 노래를 오랜만에 들으면서 지나버린 그 시절의 그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떠올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영화 <코코>를 보며 결국 사후 세계는 세상 어딘가 외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사후 세계'란 결국 살아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다. 죽은 이들은 살아 있는 우리의 추억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죽어서 살아 있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세상에 많은 추억을 남겨야 할 테다.
정말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와, 아름다운 영상으로 가득 찬 영화였다. 혹자는 디즈니와 픽사의 영화가 그저 '가족의 소중함'으로 귀결되는 뻔한 영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화가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메세지에 도착해가는 과정은 절대 뻔하지 않다. 영화 <코코>를 비롯한 디즈니의 영화는 마치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동화'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뻔하고 명백해서, 그래서 우리가 잊고 사는 중요한 가치들을 잊지 않게 해주기 위해 우리 곁에 존재하는 동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