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주원 Feb 23. 2018

나도 아주 심어질 수 있을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난 이 영화가 무조건 여유가 넘치는 시골로 돌아가자는, 귀농 장려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틀 포레스트>는 그저 '여유'를 찾아 헤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여정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처음엔 '돈'과 '부'가 주는 여유를 찾아 서울로 향한 사람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모이다 보니 점차 여유는 사라지고 공해와 매연, 쓰레기만 남은 서울. 그리고 다시 '시골'을 바라보며 여유를 찾는 사람들.



 겨울의 끝자락, 요즘 나는 운동에 심취해 있다. 몇 년을 놓고 있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한 계기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붙어가는 살을 빼기 위해, 건강을 위해서라는 운동을 시작하게 된 식상한 취지는 집어치우겠다. 왜냐면 그 기저에 깔린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으니까. 사실 운동을 시작한 건 그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마음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만히 있으면, 마음은 더 조급해진다. 남들은 몸도, 마음도 풍요로운 인생을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데, 난 뭘 하고 있는가.


 그러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영화 용어에 'meet-cute'라는 말이 있다. 결말에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될 남녀 커플에 처음 만나는 장면. 그것도 밋밋하지 않은, 매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이런 와중에 만나게 된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는 내게 'meet-cute'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쉼표 같은 영화였다. 보는 내내 편안했다. 어차피 '마침표로 달려가는 하나의 문장'같은 게 인생 아니던가. 우리는 어느샌가 문장 중간중간에 쉼표를 찍는 방법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나를 비롯한 청춘들에게,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간지럽게 귓속말로 속삭여주는 듯한 영화였다.


 왜 귓속말로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까. 그것은 아마 이 영화가 힘을 쫙 빼고, 담담하고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일 테다.



 사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비탄과 우울에 잠긴 혜원(김태리)이 고향 산골 마을로 돌아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보내는 이야기다. 그리고 동네 친구였던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을 만나 옛날과 요즘을 넘나드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관객을 웃겨주겠다고 힘을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진짜 동네 친구보다 더 동네 친구 같은 김태리와 류준열, 진기주 세 배우는 케미는 가벼운 이야기만으로도 관객들의 큰 웃음을 자아냈다. 웃어달라 강요받지 않는 편안한 웃음이었다.



 엄마(문소리)조차 다른 곳으로 도망가버리고 아무도 없는 고향 집. 그곳에서 혜원은 단지 며칠만 쉬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 읍내로 나가는 데만 50분인 걸리는 첩첩산중 산골. 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그곳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바쁘게 사느라 잊었던 삶의 모습을 되찾아간다. 혼자서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친구들과 함께 나눠 먹는다. 배우 김태리는 참 손이 야물다는 생각이 계속 들 정도로 배추전, 막걸리, 꽃 튀김, 봄나물 파스타 등 다양한 요리를 척척 해냈고, 임순례 감독은 그 요리들을 아름다운 색감으로 카메라에 잘 담아냈다. 따뜻한 시골집에서 친구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김치전에 막걸리를 먹는 모습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졌다.



 영화에서 혜원이 떠나 온, 대한민국의 대도시를 대표하는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서울'은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을 의미한다. 집 앞 5분만 나가도 편의점과 가게들이 즐비하다. 없는 거 빼면 다 있는 곳이다. 사실, 없는 게 없다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혜원의 '시골' 고향집은 다르다. 일단 '몸'이 너무 불편하다. 간단한 생필품만 사려고 해도 50분 거리를 달려 읍내에 나가야 한다. 보일러가 없어 장작을 패야하고, 여름엔 에어컨도 없이 무더위를 오롯이 버텨내야 한다.


 그래서 였을까. 서울은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성공'을 의미하는 장소였다. 부모님들이 소 팔아 가며, 농사 지어가며, 혹은 다른 일로 뼈 빠지게 돈 벌어 가며 공부시킨 가장 큰 이유는, 내 자식 '서울'에 보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화려하고 깨끗한 거리들, 쾌적한 아파트. 그 모든 것들이 '여유'였고, '성공'을 뜻했다. 수많은 청춘들은 부모님의 기대를 등에 업고 서울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제 서울은 누구에게나 그런 성공을 허락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부'를 누리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드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서울에서 성공하길 원한다.


 처음 혜원도, 고향으로 도망치 듯 '떠나' 온 자신의 모습에 창피함을 느꼈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먼저 임용고시에 덜컥 붙어버린 남자 친구에게도, 동네 친구들에게도, 고모에게도. 오래도록 우리에게 '귀향'이란 '실패'를 의미하는 단어였으니까.  


 하지만 처음엔 하나같이 아픈 곳만 콕콕 찌르던 고모도, 친구도 결국 혜원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안쓰러운 마음에 밥은 먹었냐고 물어주는 고모와 두 팔 벌려 친구를 꼭 안아주는 은숙, 씩 웃으며 귀여운 강아지를 안겨주고 가는 재하. 그 누구도 그녀의 '귀향'을 책망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실패'라고 생각하는 건 그저 혜원 혼자 뿐이었다.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을 벗어나 고향의 흙바닥으로 돌아온 혜원은 배추, 양파, 옥수수, 토마토, 감 따위를 심고 기르고, 먹는다. 돌아온 혜원이 농사를 짓고, 자신이 지은 농작물로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 1년은, 바쁜 도시에서의 일상 속에 잊고 살았던 계절의 변화,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점점 마음의 여유와 삶의 행복을 되찾아가는 1년이다. 도망치듯 고향에 온 혜원과 달리, 역시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다 돌아와 과수원에서 사과를 키우는 재하는, 농사 같은 거 힘들지 않냐는 혜원의 말에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는 농사가 딱 맞는 거 같아. 적어도 이 일에는 잔머리, 꼼수 이런 건 없잖아.


 그리고 또 다른 재하의 한 마디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뭐가 해결이 돼?

 

 '서울'은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너무 불편한 곳이다. 우리는 서울에서의 빡빡한 경쟁 속에서, 한 번의 실패에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 그러다 보니 '여유'는 어느새 사치가 되어버린다. '서울'의 사람들은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에도 눈을 흘긴다. 편의점에서 카드가 안 긁힌다고 죽일 듯 으르렁대며, 그저 지하철을 놓쳤을 뿐인데 중요한 면접에 떨어진 것처럼 욕을 내뱉고, 성질을 낸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어떤 일이든 빠르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서울'의 장점은, 사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뭐든지 빨리 해야만 하는, 공허하고 척박한 서울 생활을 반증한다.



 반대로 시골은 '몸'은 불편할지는 몰라도, '마음'은 편한 곳이다. 시골에서는 하나하나 다 해야 한다. 삼시세끼 밥을 먹으려면 가까운 마트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물을 재배하고 곶감을 말리고, 모내기를 해야 한다. 뭐든지 다 힘들고 긴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몸은 불편하지만, 실패할 걱정이나 조바심이 없기에 '마음'이 편하다. 삶의 '여유'가 넘친다. 그래서 벌레가 득실거리고, 동네 어르신들이 이것저것 물으며 오지랖을 부리셔도 싱글벙글 웃을 수 있다.

 

 가끔은 '자연'의 짓궂은 장난으로 추수 직전 벼가 무너지기도 하고, 잘 익은 사과 농사를 망쳐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세차게 내린 비에 무너진 벼들을 보며 고모는 어디 사람이 자연에 대적할 수 있겠냐며, 묵묵히 무심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벼를 세운다. 재하도 떨어져 버린 사과들을 보며 실망하다가도, 괜찮냐는 혜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초보 농사꾼, 수업료 한번 거하게 낸 셈 치지 뭐."


 그렇다. 재하는 도시를 '떠난'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답을 못 찾아 돌아온 자기와 달리, 재하는 답을 찾아서 돌아왔다는 혜원의 말처럼. 그렇기에 어떤 시련에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확신을 갖고 이곳에 돌아왔기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저런 시골이 어딨냐고. 저렇게 예쁜 시골집이 있다면 나도 당장 가고 싶겠다고. 사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농사는 뭐 그냥 땅 파서 하나, 밑천이 있고 돈이 있어야 하지.


 하지만 난 이 영화가 무조건 여유가 넘치는 시골로 돌아가자는, 귀농 장려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틀 포레스트>는 그저 '여유'를 찾아 헤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여정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처음엔 '돈'과 '부'가 주는 여유를 찾아 서울로 향한 사람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모이다 보니 점차 여유는 사라지고 공해와 매연, 쓰레기만 남은 서울. 그리고 다시 '시골'을 바라보며 여유를 찾는 사람들.


 아마 혜원도, 재하도 시골에서 살다 보면, 또다시 도시가 그리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서울'에 사는지 '시골'에 사는지가 아니다. 하나 확실한 건,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한 번 사는 인생, 몸도 마음도 여유롭고 풍요롭게 살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서울'에서 발버둥 치는 사람들 중 하나다. 가만히 있는 법도, 여유를 즐기는 법도 모르는. 바쁘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그저 항상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쫓기는 처량한 청춘이다. 저 넓은 들녘을 자전거로 내달리며 환하게 웃는 혜원의 모습을 보며, 죽기 살기로 좁은 러닝 머신 위를 바삐 뛰는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냥 마음 편히 살고 싶을 뿐인데 왜 이리 바쁘고 힘들게만 살려하고 있을까. 재하의 말처럼, 바쁘게 산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텐데. 여유를 찾아 바쁘게만 살다가, 결국 이러다 죽게 되는 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재하와 은숙은 시골을 떠나 서울로 돌아간 혜원의 이야기를 한다. 대화 중 재하는 이렇게 말한다.


난 혜원이가 금방 돌아올 거 같은데.
혜원이는 지금, 아주 심기를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시와 시골에서 갈팡질팡 옮겨 심어지던 혜원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은 정겨운 이 시골 땅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의 아주 심기. 묘목이나 모종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 계속 자리를 바꾸어 심다가, 충분한 거름 위에 완전하게 심어지는 순간. 그렇게 답을 찾은 혜원은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고향에 아주 심어지기를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재하의 말.



 그 말을 들으며 난 다시 날 생각했다. 완벽히 도시 체질인, '서울' 사람인 줄 알았던 나는 어느새 혜원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이 오손도손 살아가는 <리틀 포레스트>의 산골 마을을 보며, 그 여유로움과 정겨움에 행복한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치고 힘들어도 다시 돌아갈, 아주 심어질 흙이 있는 그 순진무구한 청년들. 하지만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태어나 지금껏 28년을 위태위태 버티며 살고 있는 나는, 콘크리트에도 흙에도 심어질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과연 이런 난, 어딘가에 아주 심어질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전사'들이 만들어 낸 '용기'의 드라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