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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May 16. 2018

사랑의 맛

영화 <케이크 메이커>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케이크는 사랑의 은유이며, 사랑의 박제다.


사랑이란 그저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며, 함께하고 싶은 무엇보다 단순한 것일 텐데, 세상은 그것을 복잡하게 만들려 한다. 세상은 사랑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하지만,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사랑에 옳고, 그른 것은 없다. 그저 사랑일 뿐.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랑의 군상은, 결국 하나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이 뭐라고 부르던, 사랑은 케이크처럼 '달콤한 것'이라고.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그 '달콤함'을 차지하기 위한 역사이며, 세상은 그렇게 흘러 왔다고.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것을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더러운 사랑이라고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이란, 빠져버린 이에겐 그렇게 헤어나올 수 없도록 달콤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케이크 메이커>. 제목부터 달콤함을 가득 풍겼다. 우리에게 케이크가 주는 달콤함은 좀 특별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좋은 날' 케익을 먹는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을 위해 기념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으레 가장 먼저 케익을 찾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케익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랑의 박제'라고나 할까. 우리는 그 박제 위에 촛불을 꽂고 불을 끄며, 함께 그 박제를 나눠먹으며 친밀함을 다진다. 타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무성애자들은 '성행위보다 케이크 한 쪽이 낫다'는 말이 대표적인 슬로건이라고 한다. 케이크는 인간에게 사랑의 은유이며, 사랑의 박제다.


 맞다. 영화 <케이크 메이커>는 사랑에 관한, 케이크를 만드는 어느 남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베를린의 한 카페에서 케익을 만드는 청년 토마스와 이스라엘에 가족이 있음에도 토마스와 내연 관계를 이어가는 남자 오렌, 두 남자의 위태로운 사랑으로 시작된다. 오렌은 이스라엘에 있는 가족에게 사다 줄 케익과 과자를 사기 위해 베를린에서 케익이 맛있기로 유명한 토마스의 카페를 찾게 되었고, 결국 둘은 눈이 맞는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독일을 오가며 아슬아슬한 사랑을 이어가던 오렌이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상실감에 아파하던 토마스는 자연스레 오렌이 살던 곳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찾는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에서 역시 카페를 운영하는 오렌의 부인 아나트와 그의 아들 이타이를 만나게 되고, 토마스는 아나트의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다. 여기서 토마스와 오렌의 가족인 아나트와 이타이를 연결해주는 것도 역시 '케이크'이다. 케이크 맛에 반한 아나트와 손님들 덕분에 아나트는 계속해서 토마스를 필요로 하게 되고, 토마스는 점점 아나트와 가까워져간다.


 처음에 나는 영화를 보며 등장 인물들의 행동의 이유를 찾기 바빴다. 도대체 토마스는 왜 예루살렘에 찾아갔는가. 왜 아나트와 이타이에게 접근했는가. 왜 아나트의 카페에서 일하기를 원하는가. 그리도 애타게 사랑했던 오렌의 흔적을 찾아서? 가족을 잃은 이들에 대한 동정 때문에? 그리고 아나트는 갑작스레 다가오는 토마스에게 왠지 모를 묘한 긴장과 이상한 심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와 점점 가까워지려 하는가.



 하지만 이유를 찾고 있는 내가 어리석은 것이었다.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랑'은 참 속편한 단어다. 구구절절 이유를 대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한 마디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없는 '이끌림'을 말할 수 있다. 그 이유없는 이끌림 때문에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짝사랑하는 이의 집 앞을 괜시리 서성대기도 하고, 지금은 나 혼자만의 추억일 수 있는 장소로 아무 이유없이 가보기도 한다. 그 사람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다. 그저 사랑이 나를 그리로 이끄는 것이다. 


 사랑은 흐르는 시간에 내 몸을 그대로 맡기는 일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은 아득히 저 너머로 멀어져 가고 그저 감정이 이끄는 대로, 즉흥적인 기분이 시키는 대로 날 움직인다. 토마스가 예루살렘에 간 것도, 아나트의 가게에서 케이크를 만들게 된 것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 시킨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일 것이다. 토마스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이 너무도 커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는 이성을 잃은 채 사랑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휘둘리고 있는 난파선이다. 



 아나트도 그렇다. 아나트도 토마스 만큼이나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케이크를 만드는 독일 남자. 남편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 토마스가 그녀의 카페에서 일하게 된 것도, 점점 그와 가까워진 것도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아나트의 마음 한켠에 자리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상실감을 토마스는 조금씩 치유하고 있었다. 오히려 모티 삼촌을 비롯한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방인인 토마스를 경계했고, 그녀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그런 이 영화에서 갈등을 자아내는 소재도 '케이크'다. 토마스의 케이크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식재료를 선택하고 조리한 음식인 '코셔' 율법에 어긋나는 음식이었고, 이타이의 삼촌인 모티는 힘들게 얻은 '코셔' 인증서를 잃게 될 수 있다며 토마스가 카페에서 케이크를 만들지 못하도록 한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케이크'와 '코셔'의 갈등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사랑'으로 인해 겪는 갈등을 은유한다. 유대교 사회는 철저하게 율법에 의해 움직이는 금욕적인 사회다. '샤밧'과 '코셔'는 그것을 반증한다. '코셔' 인증을 받지 못하면 카페 자체가 존폐 위기를 맞을 정도로 이들에게 계율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하듯, '케이크'는 달콤하다. 아나트는 토마스의 케이크가 코셔 인증을 받지 못한 음식임을 알면서도, 점점 그가 만드는 케이크의 달콤함에 매료된다. 마치 사랑처럼. 사랑은 언제나 인간이 만든 모든 인위적인 장애물과 걸림돌을 비웃기라도 하듯 찾아온다. 

 

 오렌의 아들 이타이는 처음에는 토마스가 만든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 그 이유를 물어본 엄마 아나트에게 이타이는 이렇게 말한다. 


"모티 삼촌이 토마스가 만든 케이크는 먹지 말랬어요."



 사랑에 빠진 이에게 사랑은 케익처럼 달콤한 것이지만, 그걸 바라보는 주변 사람에게 그 케익은 '독약'처럼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항상 주변인들이 먼저 위험한 사랑을 감지한다. 모티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세상은 그런 위험한 사랑을 막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엄격한 계율의 유대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 그들의 계율에 어긋난 케이크를 만드는 이방인 토마스. 그 갈등의 구조는 아마 사랑과 그 사랑을 판단하는 인간 사회를 은유하고 있는 것일테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에게는 아름답기만 한 사랑일텐데. 세상은 그것을 규칙에 어긋난다고, 율법에 어긋난다고, 불륜이라고, 동성애라고 그것을 비난하고 욕한다. (불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불륜도 당사자들에게는 사랑일 테니까.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랑은 위험할수록 더 달콤한 것을. 사실 토마스가 오렌과 내연의 관계에 있던 사람임을 알게 된다면 이 위험한 사랑은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에. 한번 맛보면 멈출 수 없는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처럼 달콤한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의 맛은 생각처럼 달콤하기만 하지는 않다. 인간 세상은 사랑을 얼마나 다양한 단어로 이야기 하는가. 세상이 그 사랑을 어떻게 바라봐 주느냐에 따라 그것은 아름다운 순정이 되기도 하고, 불륜이 되기도 하며, 어지러운 치정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따귀처럼 강렬한 아픔의 맛을 내기도 하고, 잃고 난 뒤에는 깊은 쓰라림의 맛을 안기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또 사랑한다. 오히려 힘들고 아픈 사랑일수록 포기하지 않으려는 오기가 생긴다. 제 3자의 시선에서 보면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한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케이크'처럼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무엇인가에 빠져들기 위해서는 유인이 필요하다. 그 모든 아픔을 감수할 만큼 달콤한 케이크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저 없이 그 케이크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날 파멸로 몰고 갈 케이크일지라도, 그것이 그 파멸을 감수할만큼 달콤하니까. 그것이 세상 행복한 웃음이어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울음과 눈물이어도 결국 그 사랑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제 3자들은, 세상은 결국 그것이 독이 될 것임을, 두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갈 것임을 안다.

 

 세상은 그것을 막으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절제의 미덕인 것은 아마 사랑의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아마도 그런 위험한 사랑을 세상의 규칙이라는 말로, 인간으로서의 도리라는 말로 막으려고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결국 막을 수 없다. 

 사랑이란 그저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는 감정에서 발현한 무엇보다 단순한 것일 텐데, 세상은 그것을 무엇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세상은 사랑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하지만,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사랑에 옳고, 그른 것은 없다. 그저 사랑일 뿐.


 사랑은 이성과 사유로 대표되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역설적이게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 인간이 사라질 때까지 그럴 것이다. 그 때까지 세상은 '사랑'때문에 웃고, 울게 될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랑의 군상은, 결국 하나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이 뭐라고 부르던, 사랑은 케이크처럼 '달콤한 것'이라고.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그 '달콤함'을 차지하기 위한 역사이며, 세상은 그렇게 흘러 왔다고.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것을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더러운 사랑이라고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이란, 빠져버린 이에겐 그렇게 헤어나올 수 없도록 달콤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108분의 러닝 타임동안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정의하지도, 판단하려 하지도 않은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의 노력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영화는 그저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그 미련할 정도로 비이성적인 행동들을.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런 사랑의 달콤함이 불러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들이 모여 이루어진 복잡한 실타래 같은 영화다. 예고편을 보면 이 영화를 치유 영화, 힐링 영화인 것처럼 말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을 다루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사랑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싶고, 그것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꼭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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