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본사 영업부로 발령을 받은 남편은 출장이 잦아졌다. 금요일인데 집에 못 오는 게 짜증이 났는지 퉁명스러운 말투가 그대로 전해졌다.
진정 바쁜 건지 귀찮은 건지 헷갈리게 들리긴 했다. 내 말은듣지도 않는다. 이미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결혼하고 2년이라는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냉소적인 말투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너그러움이 차고 넘치는 부부 사이다. 이런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면 치맥 타임이 한 번쯤 줄어들 뿐이다.
하지만 금요일이다. 로또처럼 더럽게 안 맞는 남자와 유일한 힐링은 치맥 타임이다.
어찌 그리 서로 입맛이 안 맞는지 결혼하고 알았다. 잡은 물고기에는 밥을 안 주는 뻔한 스토리가 진리라는 걸 깨닫는 삶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금요일 밤인데 내일 온다고? 오늘 밤에는 혼자서 치킨을 시키고 맥주를 마셔야겠다.'나 혼자 산다'에 집중해야겠다. 맥주만 들어가면 쉴 새 없이 최근에 입문한 주식 이야기에 굳이 호응해 줄 필요가 없다는 그것만으로도 불금을 제대로 누릴 수 있으니까.
아침 출근할 때 정신없는 날을 제외하고는 꼭 확인하는 일이생겼다. 건물 복도에 새로운 조명이 설치되고나서부터다. 오늘은 분명 이른 새벽에 복도 LED 자동 비상 센서등 스위치가 OFF임이 정확히 확인했고 층별 위아래 스위치 위치까지 검토했다. 특히 금요일은 필수과제다. 오늘은 그 누구에게도 퇴근 소식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1층 공동 현관 입구에서부터 4층까지 올라가는 복도에서는 살금살금 걷는 고양이로 변신한다. 하루 중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큰 호흡을 내쉬고 입구에서부터 여유롭게 2층 반까지 올라왔다. 이제부터다. 숨을 멈춘다.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날렵한 속도로 올라간다. 제기랄! 3층을 코 앞에 두고 복도 불이 켜졌다. 빛은 정확히 3층 반투명 유리 현관문을 뚫었다. 중문 안쪽을 거쳐 거실까지 관통했다. 순간 소머즈 귀가 장착되었는지 미세한 TV 소리와 함께 선미(가명) 엄마, 물 좀 가져와라는 말이 명확하게 꽂혔다.
'OO이 들어왔나 봐', '불 켜진 거 보니 잘 되네', '고장 난 줄 알았는데 아니네', '누가 일부러 꺼논건가?'라는 대화가 들리는 듯했다.
아이씨, 왜 불이 켜진 거야? 당황한 발걸음이 미쳐 다시 스위치를 OFF로 내릴 생각도 못하도록 4층으로 순간이동을 시켰다.
며칠 전 누군가가 어김없이 복도의 스위치를 내리고 출근한 그날 밤이었다. 만취한 남편이 계단을 오르며 살짝 발을 헛디디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살짝 삐끗한 정도였다. 오빠보다 9살이나 어린 여동생이 요즘 만나는 남자가생겼는지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주 2회꾸준히오전 복도 계단 청소를 하시는 손길이스위치까지확인하는 걸 알게 되었다.
이른 새벽에 출근해서 별을 보며 퇴근하는 병원 지하 2층 급식실에서 일하는 사람, 하루 종일 햇빛 한 번 마주할 시간이 없는 이에 대한 배려도포함이겠지?
센서등은 눈부시게 밝아 반투명 유리까지는 쉽게 관통했을지 몰라도 결코 사람의 마음까지는 뚫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로막의 두께는 알 수가 없었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두 사람의 보이지 않은 신경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