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층에 들어오자마자 우리 집 거실 한가운데 간신히 욱여넣어 천장과 맞닿아 있는 냉장고가 보였다.
퍽퍽한 고구마가 들어있는지 답답하다는 소리가 들렸다. 옆면을 응시했다. 각종 전단지와 쿠폰 모임 장소이다. 가끔 씩 빛바랜 전단지들은재활용함으로 거처를 이동한다. 그에 비해 자석 쿠폰들은 각자 모양과 이름에 맞춰 5열 종대의 칼각으로 언제든 10장이 모일 만만한 준비를 하고 있다. 언제든 그 영역을 확장할 기세다. 가장 길게 늘어선 양념치킨 쿠폰들은 곧 원래 주인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2장만 모으면 공짜로 1마리를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엊그제 퇴근하면서 1층 출입구에서 챙겨 왔던 전단지다.
‘오븐으로 구운 치킨’이라 '맛있게 먹으면 0Kcal'라는 문구와 함께 오픈 기념 서비스로 감자튀김까지 제공한다는 문구의 유혹은 충분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이내 다른 곳에 머물렀다.
'배달 앱 결제 가능'
티브이를 보다가 ‘멈춘 거 아님’이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시간과 시선이 한참 동안 그 전단지 아래쪽에 머물렀다. 앱 결제 후 리뷰 작성 시 콜라도 1.25L로 업그레이드까지 해주는 서비스가심장을 더 빨리 뛰게 만들었다.
달콤하면서 마늘향의 풍미까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익숙한 양념치킨과 오븐으로 구운 치킨을 놓고 고뇌에 휩싸였다. 남편이 있었으면 고민할 필요가 없이 바로 주문이 끝났을 것이다. 숙소에서 고생하고 있을 남편이 아련하게 0.1초 정도 스쳐 지나갔다. 고민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손을 뻗어 답답해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맥주캔은 자정을 넘을 수 있는 시간까지 버티기에 충분했다.
치킨 고민은 오히려 쉽게 결정되었다. 혼자 있는 이 고요한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입을 여는 것보다 검지 손가락의 힘을 빌리고 싶어졌다. 사실 남편 모르게 며칠 전 배달앱을 깔아놨다. 남편이 없는 사이에 혼자 주문에 성공해보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다. 스마트폰 어플로 주문이 가능한 금사빠 0Kcal 오븐치킨을 사전 점검 차 미리 먹어보기로 결정했다. 혼자 먹어보고 별이 다섯 개라면 다음 주 금요일에 남편이랑 같이 재평가해볼 생각이었다. 신규 주문 서비스 혜택을 누리고 리뷰 작성까지 도전했다. 신혼 초반에는 스마트폰 초창기라 전화 주문을 통해 배달을 시켜 쿠폰을 모으는 시기였다. 2년쯤 지나니 스마트폰이 대한민국 성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은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난주 남편이 소파에서 손가락만 까딱하더니 금세 치킨이 왔었다.
“오, 진짜 대박인데”
“너도 깔아놔, 이런 것도 못하면 어떻게 사냐?”
으스대는 말투가 거슬렸지만 닭다리를 뜯으며 맥주와 함께 삼켜버렸다.
앱 주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카드입력과 결제에서 버벅거리긴 했으나 한 번만 등록하면 다음번부터는 자동 결제되는 시스템에서 만족도가 수직 상승했다. 주소도 틀림없이 입력했다. 1234-5번지 4층.
주문 완료 알람에 쾌재를 불렀고 빨리 와라! 빨리 와라! 혼잣말로 되뇌며 씻으러 들어갔다.
옥탑에 살면서 불만은 항상 욕실에서 터져 나왔다. 양치질이나 세수만 할 때는 항상 고개를 15cm 이상 숙여야 했다. 샤워를 할 때는 다리를 최대한 벌리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지만 영 불편한 자세였다.스쿼트 자세처럼 어설프게 다리를 구부려도 봤지만 허벅지와 무릎이 그 시간을 버티질 못했다. 자연스레 주말에는 그 시간을 피하게 되었다.
긴 생머리는 여자의 생명인데 166cm보다 낮은 욕실의 높이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편하게 고개만뒤로 젖히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변기에 앉아봤지만 샤워기 줄은 야속하게도 짧았다. 다이소에서 구매한 이천 원짜리 낮은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감는 걸 선택했다.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도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오는구나’ 콧노래까지는 아니지만 입가에 미소는 번졌다. 꽤 오래 일정한 시간차 간격으로 샴푸와 린스, 트리트먼트까지 완벽히 소화해 냈다. 오늘은 머릿결마저 황금 비단길이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갈망한 것인가? 아직 오지도 않은 0kcal 치킨에 사로잡힌 것인가? 사실 온통 치킨 생각뿐이었다. 온기가 가득한 욕실에서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먹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렬함을 느낄 수 있는 맥주 한 모금이 온몸을 지나 발끝까지 다다랐다. 발가락 사이의 틈이 벌어져 온기가 새어 나갔다. 손등에서도 튀어나온 핏줄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짜릿한 순간이었다. 몸속은 뜨겁게 타올랐고 냉장고가 요란하게 윙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은 고요한 밤이었다. 치킨을 맞이할 시간이 다가왔다. 주인 없는 소파의 기대어 한 모금 더 들이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