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친한 친구의 생일은 현충일이다. 당연히 여자친구라서 이름이 현충이는 아니지만 기억하기 쉬운 생일이다.
생일이 12월 31일이라면 매 해의 마지막 날이라 의미 있어 보이고 그다음 날인 1월 1일은 새해 첫날이라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일만 더 뱃속에 있다가 태어났으면 '신정'이라고 딸이름을 지으셨을까?
생일이 영 맘에 안 든다고, 48시간만 더 늦게 낳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엄마한테 따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아들 하나만 키우겠다고 다짐했던 엄마에게 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어버이날, 어린이날 등의 이벤트가 있는 날이 생일인 사람은 정작 본인의 생일이 맘에 안들수도 있다.
집안 행사나 모임과 겹치는 경우가 있을 테니까.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그런 날이 생일이면 잘 기억해주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에 특별한 날이 생일인 사람이 자라는 내내 조금은 부러웠다. 아니 사실은 평범한 날이든 아니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선물을 받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아주 어릴 때는 기억이 나지 않고 학교에 다니고 나서부터다. 생일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놈의 겨울 방학 때문이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 12월 중순 이후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한 달 반 정도의 방학이 끝나면 2월 초중순에 다시 학교에갔고 3월을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 남겨놓고 봄방학을 했다.
학기 중에 생일인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와 약소하지만 그 시절 소중했던 지우개, 연필 등의 학용품 세트 같은 생일 선물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그 친구들이 꽤나 부러웠다.
그 국민학생은 6년 내내 생일이 방학이라 생일파티를 친구들과 해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들한테 받은 선물도 없었다. (물론 생일 때 부모님이 사주시는 치킨은 먹었고 아빠는 미미 인형도 사주셨다.)
여중, 여고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학기 중에 생일인 친구들을 위해서 모닝글로리, 바른손팬시, 아트박스에서 생일 선물을 자주 샀다. 시험기간과 생일이 겹치는 친구들은 시험이 끝나고 시내에 나가서 생일 파티도 했다. 그 자리 주인공이 되어서 선물을 한가득 받아 본 적도 없다.
달라진 건 겨울 방학기간이 더 짧아서 12월 중하순 경에 방학을 했고 1~2주 정도 쉬고 나서 보충수업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쉬는 기간에 생일이 꼭 포함되었다.
친한 친구 2명은 시골에서 유학 온 친구들이라 그 짧은 방학 기간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보충 수업 때 다시 만났다.
한창 교회를 열심히 다닌 시절이 있었다. 교회는 또 어떠한가? (그때도 인기 많았던 교회오빠는 항상 있었지)
12월 24일은 교회에서 성탄 전야 행사가 아주 크게 열린다. 이를 위해서 11월부터 중고등부는 자주 모여 성탄 행사 연습을 했다. 그 시기에 생일인 사람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따로 선물도 받았다. 역시나 그 자리 주인공도 되지 못했다. 12월 25일 오후까지 예배까지 마무리되면 크리스마스 행사는 종료되었다.
다시 만나는 시간은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인 12월 31일 밤이었다.
대학 시절은 말할 것도 없다. 12월 중순 경 기말고사가 끝나면 각자 알아서들 방학을 맞이했고 방학기간에는 깜깜무소식인 경우가 많았다. 타지에서 온 친구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각종 알바와 공부 등으로 오히려 얼굴 보기 힘든 시기다. 졸업을 앞두고는 취업 준비와 자격증 준비도 한창이다. 굳이 바쁜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생일 축하해달라고 모이자고 말할 정도의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취직한 직장인의 생일은 달라졌을까?
12월은 연말이라고 회식은 자주 있었으나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27,8일경부터는 연차 소진 기간이라고 지정해서 신정 연휴까지 쉬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들, 친하지 않은 회사 동료들) 회사 사람들과 굳이 생일 파티 벌이고 술을 먹어가며 떡실신되는 걸 원치는 않았다. 오히려 연말이면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이 생각나 집에 내려와서 쉬곤 했다. 친한 친구나 고향 친구들과 가벼운 술잔을 기울이며 차분하고 조용하게 새해를 맞이하며 생일은 묻어갔다.
20대의 마지막 생일, 서른을 이틀 앞둔 날.
같은 사무실에 운 좋게 고향이 같은 대학 동기인 동생 한 명이 다른 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동기와 함께 일 끝나고 맥주 한 잔 가볍게 할 계획이었다.
퇴근 후 동기는 갑자기 둘이 썰렁하게 노느니 모임이나 나가자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훗날 알게 되었는데 싸이월드에서 온 쪽지를 보고 겁도 없이 그 모임에 간 것이다. 얼마 전 화려한 과거가 담겨있는 그 망할 놈의 싸이월드 계정을 다시 살렸다)
모임에서 생일인 게 밝혀졌고 난생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갖 축하를 받았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날 모임에서 검증되지 않은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 생일날 그 검증되지 않은 남자한테 프러포즈를 받았다.
직접 쓴 편지와 꽃다발, 그리고 목걸이와 함께.
그날 이후 편지는 커녕 꽃다발도 구경 못했다. 예물을 제외하고 그에게 유일하게 받은 액세서리 선물이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생일 선물은 그날 받은 목걸이 밖에 생각이 안 난다.
(결혼하고 나서 몇 번 가방이 받고 싶어서 현금을 뜯어냈지만 구름 위로 날아갔나 흔적이 없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원했던 많은 사람들의 축하도 받아봤고 비록 가느다란 줄이었지만 내 눈에는 빛나는 목걸이 선물도 받았으니 그걸로 족하다.
예물로 받은 다이아반지는 잃어버릴까 봐 겁나서 처박혀 있는데 얼마나 실용적인지 지금도 어디 갈 때면 그 목걸이를 찾는다.
검증되지 않은 남자는 여전히 12월이 되고 연말이면 일로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진짜 일 때문인지 술을 먹으려는지 따져 묻는 시기도 지났다. 그저 집에 늦게 들어온다 하면 저녁을 안 차려도 되니 오히려 편하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30일에는 약속을 잡지 않더라. 단지 29일에 과음을 해서 30일에는 몸져누워있은 날이 종종 있었을 뿐. 생일 아침에는 본인 생일이 아니라고 미역국보다 짬뽕, 라면을 찾았다.
오늘은 12월 28일이다. 아직 들어오지 않는 남자는 내일 몸져누워있을 예정이다.
설마 내일모레 아침까지 소파와 한 몸은 아니겠지?
이제는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못 느끼는 나이가 돼버렸다.
대신 그 남자 옆에 토끼를 좋아하는 토끼보다 더 귀여운 딸이 하나 있다.
지금은 이 두 사람이면 매년 충분하다. 생일 때마다 축하를 듬뿍 받아서 행복하다.
올해는 브런치에 합격했으니 세 식구 오붓하게 브런치를 먹으러 근사한 카페에 가서 생일에 대한 추억을 더하고 싶다.
<얼마 전 대학 동기들과 갔던 분위기 좋은 브런치 카페에서 즐긴 만찬을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다>
덧붙임) 결혼 3년 만에 낳은 딸이 하나 있다. 예정일보다 2주나 빠른 6월 25일에 진통이 왔다. 6.25 사변일이 딸의 생일이 되는 게 싫었다. 다행히 꽤 길었던 진통 덕분에 6.25 사변일도 피했고, 여름 & 겨울방학 기간에 생일이 아닌 네가 참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