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미래 Feb 03. 2023

잠시 이별 중인 김밥

사무치게 그립다, 나 혼자만

"엄마! 또 김밥이야?"


"힘들다면서 왜 자꾸 김밥을 싸는 거야? 너무 살찔 것 같으니 라면만 먹는 게 어때?"


"엄마, 나도 오늘은 그냥 아빠랑 라면 먹고 싶어"


"에라이!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들 하고 있네!

특히 너까지 그러기야? 언제는 엄마가 김밥집 했으면 좋겠다면서, 흥! 칫! 뿡!"



"그럼 나 혼자 먹을 테니 절대 달란 소리 하지말아라잉, 아무도 안 줄 테니까!

글고 윗집 갖다 주면 되니께 한 개라도 먹을 생각들 하지 마쇼잉!!"



오늘도 반찬 솜씨가 없는 그녀는 그깟 저녁 한 끼를 김밥으로 때우려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움직여 김밥 재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식구들 반찬 만드는 시간과 노력보다 차라리 김밥 준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지 언 5년 차.

이제 이 집에서 김밥은 찬밥보다 더 찬밥 신세다.

김밥 준비와 김밥 싸기가 취미인 그녀는 이제 여유로운 낮에 글을 쓰고 책을 필사하는 새로운 취미에 도전 중이라 당당히 김밥과의 이별을 선언했다.







오전 11시.

대학가 주변의 식당들은 점심시간에 대거 밀려오는 학생들의 점심을 책임지기 위해 분주하다.

수능을 치고 난생처음 알바를 시작한 그녀.

얼마 전 수능을 본 경력(?)이 남아있었기에 하루 만에 열두 테이블 번호와 위치, 김밥종류와 각종 메뉴 가격 외우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다.


오늘은 알바 이틀째

10분 전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고 앞치마를 착용한다.

밀대로 바닥을 청소하고 테이블을 깨끗이 닦는다. 생애 첫 알바라서 열정이 넘치는 그녀는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입구 유리창부터 손잡이까지 깨끗이 닦았고 슬슬 밀어닥치는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아직 대학생이 되지 않은 그녀는 가게에 들어오는 대학교 언니오빠들이 왠지 멋져 보였다. 조만간 나도 그 계열에 합류할 거라고 생각되니 알바하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서 오세요, K김밥입니다."


11시 반전 후부터 밀어닥치는 손님들의 순서를 생각보다 차분하게 주문받는다.

주방 쪽에 음식 메뉴 오더를 내린다.


"짬라(짬뽕라면) 2개 있습니다."(1번이라 적는다)

"라볶이 1개요"(3번이라 적는다)

"떡볶이 2인분이요"(5번이라 적는다)


그리고 가게 앞 김밥테이블로 가서 김밥 오더를 내린다.


"모둠김밥 2줄이요"(1번이라 적는다)

"계란말이 김밥 2인분이요"(3번이라 적는다)

"야채김밥, 참치김밥 있습니다"(5번이라 적는다)


주문을 넣은 그녀는 주방 앞 테이블 인원수에 따라서 앞접시와 쟁반을 세팅한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계속 주방과 김밥테이블을 번갈아 쳐다보며 최대한 빨리 손님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짬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김밥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순식간에 손님으로 꽉 찬 가게는 분주하다. 하루 중 유일하게 점심과 저녁 피크 타임에만 나타나는 사장님도 손수 김밥을 썰고 포장 손님을 맞이하기 정신이 없다. 그렇게 두세 번 정도 테이블 손님이 바뀌고 폭풍은 쏜쌀같이 지나간다.

폭풍이 지나갔어도 도돌이표처럼 다시 테이블 정리를 하고 바닥을 닦고 쏟아져 나오는 그릇을 정리하기 바쁘다.

한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장님(계산을 하며 오전 수입을 체크하는 일이 어쩌면 제일 바쁜 일일지도)을 제외 한 모든 사람들은 오후 장사 준비를 하며 여전히 분주한 모습이다.


오후 2시 반.

방에 있던 이모님들 2명, 김밥테이블의 이모님 1명과 사장님 그리고 알바생이 한 자리에 앉는다.

알바 2일째인 알바생은 오늘도 점심으로 김밥이 무척이나 먹고 싶었다.

참치+김치+소고기 3종으로 들어간 모듬김밥 생각 덕분에 어젯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평소 금사빠의 스타일의 마음을 간파한 계란말이김밥은 하루 만에 짝사랑이 되어버렸다.

(며칠 지나 보니 제일 만들기 어려운 김밥이 이 두 가지였다)


어제는 첫날이라 어찌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단지 알바생이 새로 왔다고 짬라에 들어가는 오징어가 볶음메뉴로 나와 그나마 맛있게 밥에 쓱쓱 비벼서  굶주린 배를 가득히 채웠다. 오늘은 주방에서 뭔가 보글보글 끓이는 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익숙한 냄새가 맘에 들지 않았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김치찌개에 김치 한 조각을 크게 입속으로 넣었더니 김밥을 먹고 싶어 하는 입속에 복수하듯 입천장을 불 질러놨다. 아우!

속으론 열불이 났는데 티 안 나게 맛있게 먹느라 고생했던 그 알바생이 어찌나 가여웠는지 모른다.


사실 그 알바생이 더 가여웠던 건 그 뒤로 손님이 남기고 간 김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때 일부러 구석에서 한 두 개씩 집어먹을 때였다.

그리고 어쩌다가 실수로 나온 잘 못 나온 메뉴(특히 떡볶이와 라면)를 점심을 먹고도 또 먹는 웃픈 상황들 때문일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살을 빼고 얼굴을 다듬어야 할 대학 새내기 입학 준비를 하지 못한 채 6kg 체중 증가와 함께 후덕한 턱살을 선물 받게 되었고 결국 그 알바생은 그 해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김밥은 분명 살찌는 음식임을 잊지 마세요)

 


사회의 첫 경험을 대학가 앞 김밥가게에서 시작했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참으로 값진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은 이삼십 대에 펼쳐졌던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시급 1,800원이라는 낮은 입금을 받긴 했다.

(1시간 알바로 기본 김밥도 먹지 못한 시급이었다.

기본 야채김밥은 2,000원, 참치, 김치, 고추김밥 등은 2,500원이었고 스페셜 김밥은 3,000원이었다)

낮은 입금이었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큰 경험임에는 분명하다.

(남의 편은 스무 살 언저리에 서울 호프집에서 시급 4,000원을 받았다고 했다. 시급 1,800원 받고 일을 했다 하니 그걸 왜 했냐고 구박하면서도 초기에는 김밥이 맛있다고 싸는 족족 아주 잘도 처먹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대처하는 능력, 손님을 대하는 자세와 서비스 마인드, 각종 김밥 재료와 떡볶이 떡 하나에 들어가는 정성과 노력, 라면하나 끓이는 시간에 대한 정확성과 재료 배합의 중요성, 타인의 실수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심과 더불어 소스의 비법은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항목이라는 사실 (떡볶이 소스는 월 2회 사모님이 잠깐 오셔서 주방에 혼자 들어가 만들고 가셨다)은 필수 덕목이었다.

그리고  그 대학교 철학과 김밥집 사장님께 들었던 명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듯이
밥과 밥이 만나야 김밥은 완성된다"



밥과 밥이 만나도록 부단히 노력했던 흔적들, 실패 한 적도 많고 탈도 많은 김밥에 얽힌 추억들은 결국 사진으로 남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3년 만에 겨우 한 아이가 탄생을 했고 아이가 세 살 즈음 가정 어린이집에 다닐 때 처음 도시락을 준비하는 기회가 생겼다. 십수 년 만에 정식으로 김밥을 쌀 기회가 생긴 엄마는 밤새 설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몸은 기억을 못 할지 몰라도 손이 기억하고 있었을까? 밤새 손가락을 움직이며 잠을 설쳤다. 세 살 아이가 뭘 알겠냐만은 이 아이한테 기필코 최고의 김밥을 꼭 싸주고 싶었다. 아니 실은 김밥 마는 실력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 스스로 평가해 보고 싶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다. 더군다나 난이도 높은 꼬마 김밥이니 얼마나 긴장이 되었는지 준비하는 내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 뒤로 이사를 해서 4살부터는 민간 대형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동네에서 좋다고 소문난 천사 같은 원장님은 어린이집 소풍 때마다 단체김밥을 주문하셨다. 좀처럼 김밥을 쌀 기회가 없어진 후 아쉬움이 어찌나 컸는지 모른다. 어차피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독박육아 틈틈이 시시때때로 집 근처 물놀이터, 습지공원, 호수공원을 갈 때마다 혼자 의미를 부여해 소풍인 척하고 김밥을 준비했었다. 코로나로 밖에서 음식 먹기가 어려워지니 홈소풍으로 이름을 붙여  하루 종일 김밥을 싸고  쌌다.


어린이집 소풍 꼬마김밥과 독박육아 나들이 소풍 김밥






이쯤 되니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허구한 날 김밥을 싸대니 상다리 휘어질 정도의 임금님 수라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반찬 몇 가지에 찌개나 탕(닭볶음탕, 등갈비김치찌개 등)이 먹고 싶다는 언성이 높아졌다.(그게 더 힘들거든?) 밖에서 먹는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진 남의 편 님은 집에서도 맵고 짠 음식을 찾는 게 다반사였다. 어쩌다 한 두 번 지방 출장으로 고생하고 온 날이면 특별식을 제공했다. 그러고 나서 이에 굴하지 않고 또다시 김밥을 비롯해서 반찬이 없는 일품요리만 차려냈다.


심지어 집에 손님이 올 때도 김밥을 싼 적이 꽤 있었고 아이친구집에 초대받았을 때도 김밥 3종을 준비해서 간 적이 있다. 그날 모인 세 가족 9명은 떡볶이와 매운 갈비찜 만찬을 즐기기로 했었다. 아이들 3명과 부모들 중 맵질이들을 위해서, 속을 달래기 위한다는 명목하에 애피타이져로 정성껏 준비한 김밥은 인기 폭발이었다. 다들 김밥집 차리자고 난리가 났지만 우리 집 식구만 침묵을 지켰고 거의 먹지도 않더라!


아이 친구집 초대받았을 때 준비해서 가져간 김밥



설마 남의 집 갈 때까지 김밥 싸서 갔다고, 소풍도 아닌데 맨날 집에서 김밥이 자주 나온다고 벌써(아직 5년밖에 안되었는데) 지겹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 그럼 이제 진짜 김밥 안 싼다. 안 싸도 되는 거지? 정말이지? 진짜지? 그렇다고? 맞다고?

그래! 알겠어. 앞으로 라면에도 김밥이 없는 거고 떡볶이에도 김밥은 없는 거다. 소풍은 아예 꿈도 꾸지 마라! OK?


김밥과 이별을 선언한 그 이후 우리 집에서 지금까지 김밥을 만나지 못했다. 얼마 전 설 선물 세트 들어온 초특급 울트라 김세트(지난번 글 참조)에도 김밥김이 들어있었지만 아직 그대로이다. 마트에 가도 김밥 재료는 일부러 사지 않는다.

 

김밥의 이별의 대가는 혹독하다. 허구한 날 조미김과 맨밥만 만날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김밥을 찾지 않는다. 그게 더욱더 플뿐이다.




덧붙임) 떡볶이에 김밥은 참을 수 있어도 이 계절, 김밥에 딸기는 어때요? 즤 집에서 저 혼자만 김밥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