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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베테랑 칼국수
베테랑 [프랑스어] vétéran - 명사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 (베테랑 수사관, 베테랑 운전사)
중딩시절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맛집이다. 그때 당시 그 동네는 지금처럼 엄청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다. 물론 맞은편에 성심여중, 고가 있고 근처에 조선의 역사가 담긴 유적지인 경기전과 영화 약속을 촬영했던 전동성당이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은 종종 있었으나 지금처럼 관광지로 조성되지는 않았다. 비교적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라 전주사람들의 휴식처였다. 잠깐의 쉼 속에서 허기를 달래고자 방문했던 곳이 바로 베테랑 칼국수집이다. 중학생 시절 천오백 원 정도면 먹을 수 있었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었다.
지금은 그곳이 전주 한옥마을이라는 유명한 관광지로 조성되어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곳에서는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게 문화가 되었고 유행 따라 각종 맛집과 카페, 굿즈샵들이 생겨났다. 말 그대로 관광 명소다. 전주 토박이 사람들은 그곳을 예전보다 찾지 않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외부인들이 주인공이 된 셈이다. 그 안에서 수십 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는 곳이 바로 베테랑 칼국수집이다.
(가게 주차장과 내부 공사, 간판 공사 정도의 변화는 있었다)
여전히 전주맛집 리스트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그 명성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한옥마을의 굳건한 버팀목이다.
보통 칼국수하면 음식의 주재료로 이름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바지락칼국수, 닭칼국수, 만두칼국수 정도가 대표적인 칼국수 메뉴이고 재료를 우려내어 육수가 진한 해물칼국수, 멸치칼국수와 사골칼국수 등이 있는데 베테랑 칼국수는 주재료나 국물이 대표되는 칼국수집은 아니다. 그냥 베테랑 칼국수가 칼국수다. 그게 전부다.
둥그런 대접에 면과 함께 정체 모를 국물에 계란이 흐지부지 풀어져있고 송송 썰은 대파가 여기저기 떠다닌다. 이 칼국수의 포인트는 면 위에 뿌려져 있는 고춧가루, 들깻가루, 김후레이크 3가지 양념고명이다.
칼국수를 받자마자 세 가지 양념을 재빨리 고루 섞는다. 아니 야심 차게 비빈다. 국물색이 빨갛게 변하고 들깻가루와 김후레이크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국물색이 더 탁해지면 제대로 비벼진 것이다. 자, 이제 먹방 타임 시작이다.
10년 전에 먹을 때에도 나오자마자 여전히 비벼서 먹었던 칼국수
대접은 바뀌었지만 10년이 지나도 그 맛은 변함없더라
먹는 중간 일일이 바지락을 골라낼 필요도 없다. 뜨거운 국물 속 만두를 꺼내 따로 호호 불면서 먹을 필요도 없다. 고기도 없으니 질겅질겅 씹을 필요도 없다. 먹는 내내 걸림돌이 전혀 없는 칼국수다.그야말로 먹기 쉬운 칼국수다. 간편하다. 면치기에 제격이다. 후루룩 쩝쩝!! 살짝 매콤하면서도 그 사이 톡톡 씹히는 들깻가루와 함께 야들야들한 면은 그 어떤 칼국수보다 목 넘김이 부드럽다.
(고춧가루를 빼면) 아이들도 쉽게 먹을 수 있다. 면치기 하는 중간 잊지 말고 별미로 제공되는 진득한 깍두기도 한 번씩 와그작 씹어주면서 한 타임씩 쉬어갈 필요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둘이 먹다 하나다 죽어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텅 빈 대접을 만나게 될 것이다.
코로나로 한동안 멀리 계신 부모님도 찾아뵙지 못한 동시에 베테랑 칼국수도 먹지 못했다. 인터넷 장보기에 한참 빠졌을 때 베테랑 칼국수가 밀키트로 판매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두와 함께 주문한 적이 있었다.
만두는 찜기에 찌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었기에 거기서 먹었던 그 만두와 비슷했다.
문제는 칼국수였다. 면과 들깻가루, 고춧가루, 김 후레이크는 흡사했지만 동봉된 간장소스는 계란을 품지 않고 있었다. 집에서 계란을 풀고 대파를 넣어서 얼추 흉내를 내보긴 했지만 유사품에 불과한 맛이 났다. 멀어서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다. 30년 넘게 틈틈이 전주에서 먹었던 칼국수의 맛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는 밀키트로는 절대 만족할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움만 더해갔다.
올봄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는 게 질투라도 낫는지 유난히도 날씨가 변덕을 심하게 부리고 있다. 오늘도 낮에는 쾌청했는데 오후가 되니 급 바람이 불고 흐려졌다.
아이 등굣길에 다시금 패딩을 꺼내 입힌 날도 많았다. 며칠간 이어진 많은 양의 봄비로 벚꽃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 거친 바람이 머리카락을 춤추게 만들었던 날, 오전인데 저녁인 듯한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많았던 외로운 봄날들, 가끔씩 혼자 있는 배고픈 시간에 자꾸만 생각나는 음식이 베테랑 칼국수다.
내일도 비소식이 있네. 거참,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는 순간부터 베테랑 칼국수가 생각나려나? 전주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가정의 달이 다가와서 그런지 향수병이 도졌다.
전주에 가면 으레 베테랑칼국수는 우리 집 식구들에게 강제필수 코스다. 고향에 가면 타지인의 느낌으로 가끔씩은 여행을 가는 것처럼 한옥마을을 구경하고 칼국수를 먹는다. 칼국수를 먹으러 간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평소 결벽증이 심해서 아침저녁으로 집안 청소를 하시고 집안 가득한 화분의 잎들까지 먼지가 앉을 틈도 허락하지 않는 엄마는
"먼지 날리고 지저분한 곳에 뭐 하러 가서 칼국수를 먹냐, 그냥 집에서 먹자"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는 아니시지만 엄마가 끓여 낸 깔끔하고 깊은 맛을 내는 국물요리와 집밥을 선호하시는 아빠는
"복잡하고 사람만 많고 맛도 없는 곳에 뭐 하러 가냐, 그냥 집에서 먹자"라고 두 분이서 핵심을 찌르신다.
(호불호가 강한 칼국수입니다. 직접 가보시면 부모님께서 이런 말씀을 왜 하셨는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전주 토박이신 부모님은 현지인의 맛집으로 알려진 베테랑과는 결이 다른 국수맛집을 자주 가신다. 지난 이른 봄, 전주에 갔을 때 그 집 말고 베테랑 칼국수에 같이 가서 먹자고 어린아이처럼 졸라댔다. 그날따라 딸이 가여워 보였는지 못마땅해하시면서도 같이 동행해 주신 부모님도 각각 한 그릇 뚝딱 비우셨다. 남편과 딸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옆에서 국물을 계속 떠먹는 한 사람은 마지막 국물이 사라질 때까지 아쉬운 마음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전주에는 유명한 맛집과 한정식집이 수두룩이다. 그 많은 곳 중에 베테랑의 칼국수는 내게 있어서 30년 세월도 비껴간 사람 냄새 가득 풍기는 변함없는 고향의 맛이다. 옛 시절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어린 시절 추억의 맛이고 부모님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는 효도의 맛이다.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설레임 가득한 즐거운 여행의 맛도 추가되었다.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인 5월에 전주에 가면 다시 만나자! 이번에도 확실하게 비벼서 진진하게 먹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줄래?
덧붙임) 베테랑 칼국수를 먹고 나서는 필히 입안을 확인해야 한다. 고춧가루와 더불어 특히 들깻가루가 맛있게 먹은 티를 입안에서 팍팍 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