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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미래 Nov 16. 2023

첫 발행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임산부 시절 인연, 이제는 브런치 작가로 통하는 우리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14년 2월 21일이었다.


그날 코베파티(코리아베이비페어임신출산유아교육전) 1회에 임산부 자격으로 초청받아 킨텍스 연회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추운 날씨에 온몸이 움츠려 들었지만 그날 만은 무조건 집 밖을 나서야 했다.

(사실 초청 문자를 받지 못했다. 아쉬운 나머지 사전에 직접 전화를 걸어 대기자로 등록해 달라고 졸랐다. 역시나 임산부 초청이라 대기자 연락이 왔었다. 오예!)


입장 후 연회장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쭈뼛쭈뼛 살폈다. 앞을 봐도 임산부, 뒤를 봐도 임산부였다. 어딜 봐도 배 나온 사람뿐이었다. 풍선처럼 배가 빵빵한 사람들만 그득했다. (물론 초기 임산부들도 있었겠지만)

그곳에서는 배가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화성인처럼 보였다.


사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곳에 꼭 가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굳이 일부러 대기자 명단에 올려달라고 사정사정한 이유가 있었다.

첫 코베파티 기념으로 주최사에서 카시트를 주는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임산부라면 누구나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가히 그것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참석할 수밖에 없는 넘치는 필요충분조건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1명도 아니고 5명도 아니고 10명도 아니고 자그마치 50명?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 당시 몇십만 원 하는 레 xx 카시트를 진짜 진짜 공짜로 50명에게 준다는 말도 안 되는 기사에 헛것을 본 건가? 두 눈을 의심했었다. 기사가 잘못 나온 듯했다. 5가 50으로 오타처리가 된 느낌이 들었다.


행사장을 찾아온 임산부는 200명 정도였다. 50명씩 4개 조를 나누어 착석했다.

A, B, C, D조 각각 대표를 뽑았다. 나서는 성격이 아니라서 (카시트는 욕심났지만) 쥐 죽은 듯 차분함을 지켰다.

행사가 진행되면서 각종 이벤트가 열렸다. 각 조별 게임을 했고 점수를 계산했다.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극기야 테이블 위, 의자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추는 임산부도 있었다. 고가의 카시트를 위해서라면(아니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주 짧은 순간의 쪽팔림도 이겨 낼 수 있는 자신감은 지금도 여전히 제로 수준이다. 의자 위에는커녕 자리에서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 분위기에 적응 못하고 혼자서 외로움을 달래며 싸해지는 아랫배만 쓰담쓰담했었다.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한 내 시선은 결국 무대  앞에 전시되어 있는 단 1개의 카시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게 뭐라고....

그 사이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몇 주예요?"


뱃속에 아이가 있어서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다들 끼리끼리 모인 자리 같아서 한창 외로움이 깊어질 타이밍이었다. 선뜻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그녀. 뱃속에 아이를 품은 그녀에게 후광이 비쳤다.


오! 나의 구세주!

서로 몇 주차인지 이야기 나누며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 나는 7월, 그녀는 8월이 예정일이었다.

같은 도시에 사는 임산부 동지였고 나는 시댁이 위층이었고 그녀는 시댁이 같은 아파트 옆동이었다. 그 부분에서 더욱더 친밀도가 급상승한 나머지 급기야 그 자리에서 곧바로 연락처까지 주고받았다.


그 뒤로 우리는 임산부를 대상으로 하는 태교 음악회, 임산부 교육에 함께 참석 했었다. 낯선 타지로 와서 임신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그동안의 결혼생활, 가까운 시댁 이야기로 우리는 매번 서로에게 물개 박수를 쳐주며 위로를 받았고 다가올 출산의 두려움을 함께 나눴다.

몇 번의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는 6월 말에 딸을 낳았고 그녀는 더위가 한풀 꺾이는 9월 초에 아들을 출산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뱃속에 있던 아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현실에 가끔씩 놀라기 일쑤다.

우리는 그때가 서로에게 (아직까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임산부 시절이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그 시절 그녀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조리원 동기도 없는 나에게 든든한 육아 동지가 되어주었다. 안 친한 친오빠만 있는 나에게 선뜻 친언니 같은 사람이 되어주었다. 예전처럼 편하게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제든 연락하는 편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서로가 그동안 어떻게 아이를 키워 왔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서로가 통하는 부분도 많아졌다. 점점 둘 사이의 교집합의 영역이 확대되어 가는 시점, 나는 그녀와 더 많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작년에 함께 시작하지 못했던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나의 권유를 흔쾌히 오케이 해준 그녀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띵동!
새 글이 발행되었습니다.


어제 오후 기다렸던 반가운 알람이 왔다. 그녀의 브런치 발행 알람 소식과 함께 1년 전 즈음에 내가 받았던 메일 화면이 카톡으로 전송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개인적으로 힘든 일(아들 눈 수술)이 있는 상태 속에서 시작한 도전이었다. 같이 시작한 동기들의 합격 소식에 초조함이 보였다. 옆에서 나 역시 맘 졸였지만 묵묵히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고 씩씩한 그녀를 기다렸다. 난 그녀가 반드시 발행 버튼을 누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녀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바로 어제 드디어 브런치에서 그녀를 모셔왔다.

그녀의 새 글 알람이 울렸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이던가?

작년 내가 브런치 작가에 합격했을 당시 그 느낌 그대로 내 일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기쁘고 설레었다.

온 맘 다해 진심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10년 전 배불러서 만났을 당시, 그저 임신이라는 단 하나의 공감대로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졌다.

앞으로는 브런치 작가라는 공감대로 이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더 깊이 알게 되고 글로서 더 끈끈해질 예정이다. 우리의 연결고리가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슬초브런치 1기와 2기라는 말만 들어도 이제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말했던 그때를 기다리며 아이들이 독립하는 그날까지 같은 배를 타고 함께 울고 웃으며 먼 길을  항해할 것이다.



<언니! 고마워요♡ 계속해서 발행해 주세요^^

이번 주 금요일 밤 줌에서 봐요!>




덧붙임) 아 참! 그날 4개 조의 점수 결과와 상관없이 행사 막바지에 사회자가 제비 뽑기를 했다.

결국 우리가 속한 조 50명이 카시트의 행운을 얻었고 잊어갈 때즈음 그녀와 나의 집에 같은 카시트가 배송되었다.


사진출처 > 2014. 01.24 베이비 뉴스 오진영 기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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