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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미래 Dec 09. 2023

생리 팬티 빨아 쓰는 여자

하기 싫은 일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되어버린


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지 않은 것' 리스트를 만들어봤답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
재미없는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 계속 앉아있고 싶지 않다.
아니다 싶은 책을 끝까지 읽고 싶지 않다.
밤을 새우고 싶지 않다.
"잘 안될 거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등등.

이렇게 여러 가지를 종이에 써보고 나니 제가 정말 정말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두 가지가 아주 또렷해지더라고요.

첫째, 시간낭비.
둘째, 생리.
언니, 전 생리가 너무 싫어요.
그리고 오늘 시작했답니다.
이만 줄여요.

신 요조 씀

-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 중에서

지난 11월 8일에 생리를 시작했다.

생리가 시작되기 이삼일 전부터 사춘기 여자아이처럼 턱 밑쪽으로 뾰루지가 불그스름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 뒤로는 시간차 간격을 두고 아랫배가 슬슬 달아오르고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생리가 끝날 때쯤이면 뒤통수부터 목덜미까지 편두통이 이어진다. 눈감고도 찾을 수 있는 묘약. 온갖 약을 다 먹어봤지만 타이레놀이 내겐 만병통치약이다. 약을 안 먹고 버틴 적은 거의 없다. 차라리 먼저 약을 먹고 작정하고 버틴다. 이번에도 아픈 배를 움켜주고 하룻밤을 꼬박 새운다. 수십 년 동안 매번 강도는 다르지만 아무런 통증이 없이 단 한 번이라도 그냥 지나가는 일은 여즉 없었다.

'생리는 진짜 하기 싫어'


그렇게  4~5일 정도가 지나면 몸 안의 전쟁은 끝나가고 차츰 평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전쟁통 속에 아픈 배를 뒤로하고 매번 숙제를 해야 한다. 다음 날로 미뤄서도 안 되는 숙제다. 외출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몸 안의 전쟁 흔적을 남긴 생리팬티를 빨아서 재사용하기 위해서다.

누군가처럼 생리대를 사용해서 그 즉시 버리면 그만일 터 생리팬티를 직접 빨면서 시간낭비까지 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짜 하기 싫은 일을 또 하나 해치운다.


가끔씩은 시간 낭비까지 하면서 이 귀찮은 짓거리를 왜 계속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불만이 쌓여가지만 그래도 난 이 방법을 선택했다.

애 낳고 나서는 생리통이 없어졌다, 한결 나아졌다, 괜찮아졌다는 말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았으니까.

(애를 한 명만 낳아서 그렇다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지금의 방법이 나에게 제일 적은 통증(생리통 강도)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이제는 고정관념처럼 뇌리에 박혀있으니까.


그렇지만 여기서 문제는 나라는 사람은 생리주기가 매우 짧다는 것이다. 분명 11월 8일에 생리를 했는데 12월도 시작하지 않은 채 11월 말에 또 몸속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통 여자들보다 생리 주기가 짧아 1년에 15~16번 정도의 생리를 하기에 불편한 날들이 유독 더 많다. 그 불편함 속에서 생리팬티를 빨아쓰는 번거로움까지 더해지니 생리가 절대 반가울리는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언제까지 이러한 짓거리를 계속 반복해야만 할까? 곧 끝나는 시기가 다가오려나? 하지만 너무나도 하기 싫은 생리가 막상 끝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폐경이 더 반갑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일터 이 짓거리가 결코 여기서 끝이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고등학교 시절 한 달에 한두 번씩 무조건 조퇴를 했다. 이유인즉슨 뻔한 '생리통'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하루이틀 데굴데굴 구르는 일은 다반사,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괴로움과 동시에 몸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변기 앞에서 수십 번 토해내고 샛노란 위액까지 몸에서 빼내야 했다. 기진맥진으로 다음 날 죽이나 누룽지를 겨우 먹고 어쩔 수 없이 등교를 해야만 했던 그 시절, 아마도 생리통만 없었으면 공부에 더 매진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수능점수가 달라져서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중학생 때부터 매달 괴로워하는 딸이 안타까운 친정 엄마는 다방면으로 생리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셨다. 한약도 여러 번 먹어보고 쑥뜸도 해보고 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허리띠도 착용해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어디서 생리통이 생리대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서 나에게 천기저귀까지 대령했었다. 낮에는 어쩔 수 없었고 집에 오면 항상 천기저귀를 사용했다. 딸이 생리를 할 때마다 엄마의 빨랫감은 더 늘어났다. 죄송하고 미안했지만 그때는 게보린과 천기저귀가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친정 엄마의 폐경 시기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다 큰 딸이 쓴 선홍빛 천 기저귀를 매번 묵묵히 빨아주셨던 엄마의 차가웠던 두 손을 잊지 못할 뿐이다.

(엄마도 그 일이 얼마나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일이었을까?)



지난 6월 딸아이가 성장클리닉에서 정상판정을 받으면서 빠르면 1년 반뒤(5학년이 되는 시기)에 생리를 시작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내년이면 4학년이다. 머지않았다.

요즘에는 여자아이들이 생리를 시작하게 되면 다 같이 축하파티도 해주고 선물로 생리팬티 세트를 선물해 준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가끔씩 생리팬티를 검색해서 그런지 그런 광고들이 휴대폰 안에 자주 눈에 뜨인다.

지금은 천진난만한 내 딸이 곧 진짜 여자가 되어서 생리를 하는 그런 날이 곧 오겠지?

만약 생리통이 유전이라면 더 이상 상상하기도 싫다. 친정엄마는 나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유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람 체질에 따라 다르다고 믿고 싶다. 하필 내가 그런 체질로 태어난 것뿐이다.

만약 내 딸이 여자로서 나처럼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 상황을 매번 옆에서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안타까울까? 아마도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대신 아파줄 수 없으니 여전히 지금처럼 (딸의) 생리팬티를 손빨래하고 있지는 않을까? 친정엄마가 그랬던 거처럼.



요조에게

너의 첫 일기, 고맙게 잘 읽었어, 너의 '하고 싶지 않은 것' 리스트도 보았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
재미없는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 계속 앉아있고 싶지 않다.
아니다 싶은 책을 끝까지 읽고 싶지 않다.
밤을 새우고 싶지 않다.
"잘 안될 거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나는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이네.
너도 몇 년 후에 나이 들면 체력이 떨어져서 자연스럽게 안 하게 될 거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
.
.

그나저나 요조는 생리가 정말 하기 싫은 모양이구나.

정색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걸로 '생리' 얘기를 하네. 그런데 너 말이야.....
오늘 생리를 시작했다는 둥, 이런 얘기 막 아무렇게나 밖으로 해도 되는 거니?
솔직히 나 그거 듣고 완전히 뜨악했어. 그리고 나는 말야, 요조야.....
지난주에 끝났어.


경선 씀


책을 보면서 몇 년 후, 나이가 더 들면 자연스럽게 안 하게 될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생리팬티를 빨아 쓰는 일도 언젠가는 안 하게 되는 일이 분명하다.


앞으로는 지금 당장 그 일을 '무조건 하기 싫은 일'로 단정 짓고 불만을 품고 억지로 몸을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귀찮고 하기 싫은 일 중의 하나인 그 짓거리를 지금 이 시기에는 그냥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폐경이 오기 전까지, (만약 딸아이가 생리통으로 고통받는 다면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 ) 그저 내 손이 필요한 그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미리 애쓸 필요도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매번 그때마다 스트레스받을 필요도 없겠다.


아마도 이번달 22일부터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집에서 타이레놀을 미리 비축해 놓고 기쁜 마음으로 생리팬티를 손빨래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와중에 캐럴을 흥얼거릴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진짜로 생리팬티를 내 손으로 직접 벅벅 문질러대면서 핏기가 사라지고 다시 하얘진 팬티를 보면서 변태처럼 희열을 느낀 적도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 짓거리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곧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오를지도 모르니 어디 한번 그때까지 계속 속 시원하게 빡빡 문질러보자!

매번 새것처럼 새하얗게 빨아서 보송보송한 기분을 느끼는 걸 목표로 삼자!


더 나이 들어서 폐경오고 체력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그날까지 그 시간을 아깝다 생각말고 내 몸을 위해 쓰는 귀한 시간으로 소중하게 받아들여야겠다.




사진출처)직접 빨아쓰는 생리팬티 중 2개만 찍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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