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여행기, 3일차

볼게리 와이너리 투어와 볼테라, 셰프 다리오와 인종차별

by Starrwy

[첫 와이너리 투어]


숙소 체크아웃 후, 미리 예약해둔 작은 와이너리에 갔다. 슈퍼 투스칸 와이너리가 주말엔 다 문을 닫아 내가 많이 아쉬워하자 Y가 서치력을 발휘해 찾아준 곳. 와이너리로 가는 길은 (너무 당연하게도) 낮은 포도밭이 쭉 펼쳐져 있었는데, 투어 및 설명이 진행되는 장소에는 조경도 잘 가꿔져있고 큰 나무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꽤 시원했다. 건물 내부는 주황색 돌 바닥에 하얀 벽, 짙은 색 나무와 검은 철제로 만들어진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추울 때 실제로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내에 작은 화로도 있었다. 와인 병을 활용한 조명이라든지 장식들이 곳곳에 있어 이곳이 와이너리라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우리를 맞이한 가이드는 유창한 영어로 와이너리 이곳 저곳을 돌며 설명해줬다. 자신이 설명하는 도중에 어디서든 마음껏 사진을 찍어도 된다고 여유로움과 친절함을 같이 보여줬다. 오늘은 아침부터 햇살이 아주 강한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연한 초록의 포도밭이 펼쳐진 모습이 멋있었다. 이제 막 포도들이 맺히기 시작하는 듯했다. 와인을 1차 양조하는 곳, 숙성, 보관하는 곳을 안내해줬고, 와인을 숙성할 때 배럴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돌려줘야 하는데 그걸 손쉽게 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기구가 있다며 자랑스레 소개해줬다.



그리고 와이너리 투어의 꽃, 와인 테이스팅을 하기 위해 다시 하우스로 돌아왔다. 와인을 맛보기에 앞서 간단한 빵에 올리브유를 잔뜩 뿌린 접시를 갖다줬는데, 빵을 한입 맛보았더니 톡 쏘는 신선한 올리브유향이 코를 찔렀다. 위에 올려진 소금까지 너무 맛있어서 일동 모두 감탄. 갑자기 기대감이 급격히 상승했다.




오늘 마셔볼 와인은 총 3종으로 화이트 하나와 레드 둘이다. 화이트로 시작해서 레드까지 맛을 보는데, 가이드가 옆에서 와인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와 특징을 짧게 알려준다. 이탈리아어로 건배는 ‘친친’. 가이드가 센스 있게 한국어로 ‘건배’라고 해줘서 한층 분위기는 떠들석해졌다. 조금 더 캐주얼한 느낌으로는 ‘짠’이라고 해도 좋다고 답례했다. 직업 특성 상 여러 나라의 언어로 건배하는 말을 외워둔다고 한다.


그리고 테이스팅의 마지막에 그녀는 우리에게 ‘그라파(Grappa)’라는 걸 알려주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식사를 마무리할 때 마시는 술이라고. 그녀는 우리가 조금씩 맛볼 수 있게 작은 전용 잔에 그라파를 따라주었는데, 입에 대보니 굉장한 독주였다. 와인을 제조하고 남은 찌꺼기를 증류하여 만든 일종의 브랜디라고 한다. 포도 찌꺼기가 기본이라 그런지 와인에서 날 법한 향들이 복합적으로 나서 무거운 식사 뒤에 속을 정리하는 느낌으로 마신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위스키나 꼬냑 등 도수가 높은 술을 넘기는 것을 힘들어하므로, 결론적으로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정보를 알았다.


마신 와인와 올리브유는 옆에서 살 수 있어서 우선 아까 잠시 충격을 안겨줄 정도로 맛있었던 올리브유를 한 병씩 샀다. H는 마지막에 마신 그라파가 맘에 들었는지 그라파도 한 병 추가로 구매. 가이드가 부지에서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고 하여, 거의 벽을 이뤘던 협죽도 앞에서 사진을 좀 더 찍기로 했다. 하양, 연분홍, 진분홍, 빨강까지 여러 shade를 가진 꽃의 벽 앞에서 각자 포즈를 취해보았다.




[이상한 나라의 볼테라]


그리고 볼테라로 이동! 볼테라는 고도가 굉장히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 도시로, 구불구불한 1차선을 계속 올라가야 한다. 모두가 정말 손에 땀이 나는 드라이빙이었다. 운전을 했던 나는 뒷차가 트렁크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가운데 너무 구불구불한 나머지 유턴에 가까운 급격한 경사로를 몇십 분 간 운전해야 했고, 나머지 셋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얼마나 마음 졸였을지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용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도시 초입에 우리가 올라온 언덕 위에서 구릉과 도시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일종의 전망대에 잠깐 들렀다. 저 멀리 구릉들과 추수가 끝난 밭, 포도밭, 숲, 작은 집들이 보이는 탁 트인 공간. 그 위에 둥둥 떠있는 구름의 그림자가 더 운치있게 느껴졌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요새와 같은 볼테라 시내가 보인다.




이탈리아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오래된 도시인 볼테라는 기원전 8세기부터 있었던 산악 도시라고 한다. 시내의 작은 기념품샵들을 구경하다보면 자연스레 광장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한적한 이 동네에 이상하게 한 가게에만 대기줄이 있다. 구글 지도를 켜서 보니 유명한 파니니집(Panineria Al Vicolino)이다. 실내에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은 없는 테이크아웃 전문점. 다들 배가 별로 고프지는 않아 2개의 파니니를 골랐고, 그 중 하나였던 소시지(Salsiccia fresca)가 들어간 파니니는 살짝 매콤했지만 아주아주 맛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또 먹고 싶어졌다)



다시 초입에 있던 기념품샵에서 자석 같은 기념품을 사고 있는데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비를 좀 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주차장 근처에 있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거세게 몰아쳤다. 그냥 출발했으면 아까 같이 아찔한 찻길을 저 비를 뚫고 갔어야했을텐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다.



일단 따뜻한 카페 라떼 한 잔을 마시며 사진을 정리하고, 오늘 묵을 숙소로 가는 동선 등을 확인했다. 원래는 가는 길에 산 지미냐노를 들를 계획이었지만, 이런 날씨에 밖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아 일단 숙소로 가서 상황을 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비가 잦아 들고, 주차장에서 차를 찾아 다시 출발. 볼테라로 올라올 때 정도로 꼬불꼬불한 길은 아니라고 좋아했는데, 내려가는 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비를 가르며 일정 구간을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비구름이 높은 산에 걸려서 그랬는지 산을 다 내려오니 비가 온 흔적이 하나 없이 도로가 뽀송뽀송하다. 잠시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 맵, 콜레 디 발 델사]


숙소로 가는 길에 우측으로 갑자기 중세 요새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게임에서 다음 맵으로 넘어온 것처럼 너무나 급작스럽지만 꼭 들러야할 것 같단 생각에 잠시 차를 세워 들어가보는 데 모두 동의가 되었다. 지도로 찾아본 도시명은 ‘콜레 디 발 델사(Cole di Val d’Elsa)’. 엘사 계곡 옆의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떤 건물 외벽에 검 7개가 꽂힌 성녀를 기념하기 위한 작은 공간이 있었다. 아마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거나 기억할 만한 일이라서 저렇게 모두가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그려두었을 텐데, 아무 연고가 없는 외지인이 보자니 타로 카드 같기도 하고 조금 섬찟하기도 했다.




[포도밭이 보이는 숙소]


비는 이제 그쳤고, 오늘의 숙소가 있는 바르베리노 타바르넬레(Barberino Tavarnelle)로 향했다.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village)” 중 하나인 곳이라고 한다. 키안티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곳 또한 중세 요새의 모양을 갖췄는데, 올라가는 길은 거의 1차선에 가까워서 도로의 흐름을 잘 타야 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동네 행사가 있었는지 길거리에 차려입은 사람들도 많고 주차장도 거의 꽉 차 있었다. 딱 한자리가 나서 주차를 하고 체크인을 하러 왔다.


아주 작은 상점가의 1층에서 craft shop을 하는 아저씨가 주인이었는데, 열쇠 꾸러미를 건네주며 우리를 숙소로 안내해줬다. 이곳의 열쇠는 아주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는 걸 이 집에서 배웠다. 한국에서 예전에 썼던 열쇠들은 반 바퀴 또는 한 바퀴 정도 돌리고 나면 잠금이 풀렸는데, 여기는 두 바퀴 이상은 돌려야 하는 게 낯설었다.


어제 묵었던 것과 비슷하게 2층부터 시작되는 숙소는 작은 부엌과 다이닝룸이 있고 3층에 방 2개와 화장실이 있었다. 자연스레(?) 나와 K가 싱글 베드 2개가 있는 방을 사용하고, Y와 H가 퀸 침대가 있는 방을 사용했다. 그 방에는 작은 서비스 화장실이 있었다.




[셰프의 테이블, 다리오 셰프]


오늘 저녁은 넷플릭스의 ‘셰프의 테이블’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에 나온 다리오 셰프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정육점 겸 식당에 예약을 해두었다. 그곳의 특징 중 하나는 테이블마다 커다란 끼안티 와인이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것! 다만 차를 가져갈 수 밖에 없는 거리에 있어서 누군가는 온전히 즐길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게 우리의 걱정이었다.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갈 때는 자신의 집 근처기 때문에 내려줄 수 있고 올 때 탈 수 있는 택시 기사 몇 명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전달 받은 3개의 전화번호로 K가 전화를 걸었다. 구글로 검색했을 때 30유로 정도 나오지만, 늦은 시간이고 산길임을 감안해서 40-50유로를 부르면 예약을 하고, 그것에 벗어나면 그냥 차를 가져가자는 우리만의 기준을 세웠다.


과거 해외영업을 했던 K가 첫 번째 기사부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첫째와 둘째는 이미 예약이 차 있었고, 세번째 기사는 예약은 없지만 자신이 원래 오늘 일을 하지 않는 날(일요일)이라 고민해보고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다. 다시 전화를 해서 그가 부른 금액은 100유로. 너무 터무니 없는 가격에 우리가 놀라 이유를 물었고,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우리가 말했던 구글 지도에 나오는 길로 가면 밤에 야생동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 길로 갈 수 없고 조금 더 먼 길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일단 우리는 전화를 끊고 집주인 아저씨에게 그게 사실인지 물어보았다. 딱히 꼭 그럴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그의 대답. 그래서 다시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야생동물이 나오든 말든 우리가 원하는 길로 가면 얼마냐고 하니 가격을 아주 조금 깎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늦은 밤에 저렇게 비신사적인(?) 사람을 술에 약간 취한 채로 만나 차를 타는 것 자체도 괜히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을 비웠지만 세번째 기사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지 몇 번 더 연락이 와서 50유로까지 가격이 낮춰졌다. 사실 우리가 생각했던 기준까지 가격이 내려왔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터. 우리끼리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으로 가는 길,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바디아 디 파시나노(Badia di Passignano)의 종탑에서 종이 울린다.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종소리를 듣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는데, 이상하게 머리 속이 개운해지는 듯했다.



아슬아슬한 시간에 식당에 도착. 여기는 인기가 많아서인지 예약시간보다 10분 이상 지각하면 우리의 예약을 guarantee하지 않는다고 이메일에서부터 몇 차례 안내를 했다. 입구로 부랴부랴 들어가자마자 다리오 셰프가 우리를 맞이 했다. 처음에 나는 그를 못 알아봐서 그대로 식당으로 올라갔는데, Y와 K는 다리오 셰프인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우리의 자리는 가장 안쪽 자리. 바로 옆에는 한국인 부부가 앉아 계셨다. 영어를 그다지 잘 하는 편은 아닌데 옆자리의 외국인이 계속 말을 걸어와서 곤란한 와중에 말이 통하는 우리가 와서 너무나 반가웠다고 말씀해주셨다. 장모님까지 세 분이 캠핑으로 유럽 투어를 하는 중이라고 하셨는데 그 열정과 체력이 다 부러웠다.


식탁엔 키안티 와인과 생채소 모듬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타르타르와 카르파쵸부터 시작해 구운 고기까지 계속 나온다. 아쉬운 건 피클이나 겨자 종류 등 리프레셔가 없는 것. 중간에 뜨거운 올리브유에 익힌 콩을 넣은 요리가 나왔는데, 짭짤한 것이 기대도 안 했던 맛도리라 자꾸 손이 갔다.


고기 자체는 굉장히 신선하고 맛은 좋았지만 너무 rare한 상태의 고기를 나눠줘서 어느 순간부터는 먹기가 힘들어졌다. 서버에게 이야기했더니 조금 더 구워주기는 해서 그때부터 조금 더 즐길 수 있었던 거 같다.




[이건 인종차별일까?]


다만 약간의 인종차별을 당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우리가 가장 끝자리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버가 다른 서양인에게는 양질의 고기를 나눠주고 난 다음 지방이 잔뜩 붙어있는 부위를 준다거나 근막이 붙어있는 부위를 줬던 거다. 특히 큼직하게 썰린 고기가 잔뜩 쌓인 접시에서 우리에게 나눠줄 고기를 ‘고르고 골라’ 지방이 더 많은 부위를 골라줬다는 건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닐까. 기분이 나빠진 탓에 사진을 찍고 싶지도 않아졌다. 마음을 고쳐먹고 그런 것들을 잔뜩 찍어 구글 지도에 리뷰를 올릴 걸 하는 아쉬움까지 있다.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그 자리에서는 이런 생각을 친구들과 공유하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이야기하다가 다른 친구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닫고 이건 차별이 맞았구나, 라는 확신(?)을 했다. 그 서버는 대체 왜 그랬을까? 그렇게 밝게 웃으며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식사는 점차 끝을 향해 가고, 카스텔라 같은 디저트와 모카포트에 내린 에스프레소까지 등장했다. 배불리 먹고 나서 잠시 동네를 산책했는데, 저 멀리 반짝이는 불들이 예뻐보이는 거다. 그래, 기분 나빠하지 말자. 그건 내 스스로 내 여행을 망치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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