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와 포도밭, 시에나
간밤엔 자다가 추워서 깼다. 소파 옆에 큰 수건 여분이 있길래 가져다 덮었다. 잠결에 비가 쏟아지는 소리와 천둥 소리가 나는 듯했는데 운전하느라 피곤했는지 눈이 떠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K가 잠을 깨웠다.
무지개가 떴다고
Y와 H가 잤던 방에서는 포도밭이 넓게 보이는데, 그 위로 무지개가 뜬 것. 비현실적인 풍경이 너무 멋있고 또 무지개를 봤다는 행운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 사이 나머지 3명은 나보다 일찍 눈을 떠서 동네 산책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동참하기로 했다.
살짝 비가 흩뿌리지만 구름은 적고 해가 떠서 밝은 날씨. 무지개를 한번 더 사진에 담고, 본격적으로 근방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포도밭을 따라 작은 상점가가 있는데, 하루 정도 더 묵었다면 식당의 테라스에 앉아 와인 한 잔하며 느긋하게 경치를 즐겼을 것 같다.
나와 K가 잤던 방의 창문에서 보이는 Badia di Passignano를 빙 돌아보기로 했다. 이곳은 AD395년 피렌체 대주교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현재도 발롬브로시아 수도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중세부터 고전과 음악 문헌, 과학 연구를 했다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여기서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16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수도원이라니.
길을 따라 가는데, 어딘가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훅 끼쳤다. 근원은 꽤 멀리 있는 화분의 꽃이었는데, 이미지 검색으로 찾아보니 '오렌지 자스민'이었다. 이 즈음이 꽃이 피는 계절인지 토스카나 어디를 가도 군데 군데 오렌지 자스민이 피어 있어서 온통 저 향과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향이라는 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쉬운 매개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나중에 이 향기를 통해 토스카나 여행을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아 더 소중했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엔 굉장히 커다란 나무들이 양 옆으로 있었는데 비를 맞아서인지 역시 좋은 냄새가 났다. 조금 더 올라가니 수도원 앞까지 웬 클래식 자동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차 내부를 보아하니 생활감이 느껴지는 게 전시된 것이 아니라 실제 주인이 몰고다니는 차들인 것 같았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클래식 자동차로 이탈리아를 달려볼 수 있는 날이 오려나!
포도밭 옆길을 조깅하듯 달려보기도 하고, 스프린트하듯 뛰어보기도 하면서 아침 산책을 마쳤다.
숙소에 돌아와 어제 집주인이 모카포트가 있다고 한 것이 생각나 모카포트 유경험자인 내가 세팅을 해봤다.
1) 맨 아래 주전자에 물을 담고,
2) 그 윗 칸에 커피 가루를 눌러담은 다음
3) 상단을 조립하여 끓이기만 하면 된다.
물이 끓어오르며 커피가루를 지나 윗쪽에 모이게 되는 방식.
모카 포트 어딘가의 틈에서 하얀 김이 오르며 들썩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몽글몽글 마음도 따뜻해진다.
커피 한 잔의 여유. 에스프레소와 같이 진하기 때문에 나는 따로 끓인 물을 조금 섞어 마셨는데, 진한 에스프레소의 매력에 푹 빠진 Y는 그대로 몇 잔의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음미했다.
오늘의 주요 행선지는 시에나. 가는 길에 다음 숙소가 있어, 체크아웃 후 일단 캐리어를 숙소에 맡기기로 했다. 숙소 1층 가게를 오픈하러 온 집주인 아저씨와 마지막 인사를 하며 체크아웃.
날씨는 다시 맑아졌다.
시에나까지 가는 길도 너무 예쁘고 좋았다. 시선엔 구릉들이 쭉 펼쳐져 있고, 길 옆엔 길쭉한 사이프러스 나무들. 그리고 포도밭이 멀리 보이는 광경. 금방 잊어버릴 걸 알지만 이 모든 걸 머리 속에 꼭꼭 담아, 후에 언제라도 기억해내고 싶었다.
과거 시에나는 피렌체와 막상막하일 정도로 큰 도시였다고 한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대도시 시에나는 아니나다를까 공용 주차장에 빈 자리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이번 여행에서 다녔던 토스카나의 지역 중 가장 대도시에 온 느낌이 난다. 현장학습 또는 견학을 나온 학생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겨우 한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해두고, 점심을 먹기 위해 피자집을 찾았다. 뒷자리에 앉은 Y와 H가 미리 갈 곳을 알아봐준 덕이다.
피자집은 꽤 커서 야외석과 어닝을 닫을 수 있는 실내석, 가게 내부자리에도 앉을 수 있었는데, 우리는 어닝을 닫을 수 있는 실내석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타이밍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버는 부리나케 어닝을 닫았는데, 야외석의 사람들은 이 정도 비는 맞겠다는 의지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우리는 먼저 이탈리아식 식전주 스프리츠를 시켰다. 스프리츠는 프로세코(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와 아페리티프 리큐어를 섞은 일종의 칵테일이다. 쨍한 햇살을 담은 것 같은 주황색 음료를 빨대로 쪽 빨아 마시면, 프로세코의 청량감은 그대로 느껴지지만 의외로 꽤 쌉쌀한 맛이 난다. 만약 환타 같이 달았다면 마시다가 오히려 빠르게 질렸을 수도 있겠다.
스프리츠 한 잔을 마시고 있자니 비는 조금씩 거세지는 한편 주문한 피자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다. 3가지 피자와 그리스식 샐러드 하나를 시켰는데, 토마토 소스에 모짜렐라 치즈, 버섯, 아티초크, 올리브, 햄과 살라미가 올라간 Capricciosa가 가장 맛있었다. 어원을 찾아보니 Capricious(변덕스러운) 피자라는 뜻이란다. 다양한 토핑이 올라간 만큼 맛이 변화무쌍해서 그런 것 같다.
식사를 얼추 마치고 나니 비가 그쳤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에나를 돌아보려고 한다. 곳곳에 가게들이 많아, 여기 들렀다가 저기 들렀다가 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흐른다. 그러다가 눈에 보인 건 OVS라는 이탈리아 의류 매장. SPA 브랜드 같은 느낌이 났는데, 오랜만에 찾아온 쇼핑 타임이라 각자 살 만한 물건을 찾아 나섰다. 나는 올 1월에 첫 조카가 생겨 온갖 신경이 아직은 조카에게 있기 때문에 일단 지하에 있는 키즈 전용 매장으로 갔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옷들이 너무 많아서 맘 같아서는 다 사고 싶었지만, 동생도 내가 그럴 줄 알고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터라 고르고 골라 여름에 입을 만한 화려한 색감의 원피스 하나를 집었다. 보들보들한 100% 면으로 만들어진 소재라 얼른 조카에게 입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동선에 있던 거의 모든 가게를 들락날락 하다가 어떤 식료품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감각적인 푸드 디스플레이 방식에 나도 모르게 홀린 것 같다. 트러플이 들어간 버섯 조림과 화이트 트러플 크림, 칸투치니 하나씩을 샀다. 칸투치니는 토스카나 지방의 과자인데, 말린 과일이나 아몬드 등의 견과류가 들어가는 살짝 딱딱한 과자다. 그래서 진한 커피나 스위트 와인에 찍어 먹는 것이 이탈리아 사람들이 주로 먹는 방식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넣지 않은 플레인 맛, 아몬드를 넣은 맛, 피스타치오를 넣은 맛 등 종류도 굉장히 많았다. 트러플 버섯 조림과 크림은 한국에서 파스타를 만들거나 버섯 스프 등을 만들 때 요긴하게 사용할 것 같아 사봤다. 스테이크처럼 구운 고기에 얹어 먹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한번 병을 열면 빠른 시일 내 소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러 명이 모여 식사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비알레띠(Bialetti)라고 하는 커피 모카포트로 유명한 브랜드의 가게가 있어 잠시 들렀다. 이탈리아 국기를 떠올리게 하는 삼색 조합부터 알록달록한 색까지 다양한 크기의 모카포트가 전시되어 있었다. 과감한 색 조합의 에스프레소잔 세트, 물병, 설탕 그릇, 숟가락 세트도 구비되어 있었는데, 한 마디로 모카포트로 커피를 끓여 설탕을 넣고 마시기까지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모카포트에 올해 연도가 쓰여 있는 것도 있었는데, 아마 올해 이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서울에 돌아와 몇 년이 흐르더라도 그 모카포트를 꺼내 커피를 끓인다면 잠시나마 그 모카포트를 샀던 24년 시에나의 여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지인이 방문해서 커피를 끓일 때 그 모카포트를 보며 작은 추억을 한번 공유할 수 있을지도. 집에 이미 모카포트가 하나 있지 않았다면 하나 샀을 것 같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캄포 광장에 도착했다. 볼테라의 광장에 비할 바가 안 되도록 큰 광장! 조개 모양의 광장은 살짝 경사진 형태인데, 중세 시대 당시에 있었던 9개 의회를 기념하기 위해 9개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타이틀도 있다.
가장자리에는 만자탑(Torre di Mangia)이라는 높은 탑이 하나 있고, 그 옆에는 푸블리코 궁전이 있다. 비슷한 높이의 중세 건물들로 주욱 둘러싸인 광장에 우뚝 솟은 탑의 모습은 꽤나 이질적인데, 요즘 서울로 치환하자면 롯데타워를 보는 느낌과 유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예전엔 저 탑에서 중세시대의 정신을 지배한 신, 하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푸블리코 궁전 입구의 중정까지 들어가자 알 수 없는 건물의 압도감에 살짝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 건물이 가진 역사에서 오는 것이겠지?
광장 옆의 작은 기념품점에서 자석, 엽서 등을 산 다음 커피를 충전하기 위해 카페에 갔다. 바 테이블 밖에 없는 아주 작은 카페 Torrefazione Caffetteria Fiorella. 손글씨로 쓰여진 메뉴가 정겹다. 무심하게 내려주는 카페 마키아토 한 잔과, 함께 나눠 먹을 작은 과자 두 조각을 샀다. 갖가지 설탕이 산더미 쌓여 있는 모습이 귀엽다. 딱 두 번의 넘김이면 다 마셔버릴 양이었지만, 한 방울이 아까울 정도로 맛있어서 목이 꺾이도록 털어마셨다.
비누, 냅킨, 테이블보 등을 파는 작은 가게, 젤라또 가게, 토스카나 와인을 주로 파는 바틀샵, 살라미나 소시지, 생햄 등을 파는 가게 등을 지나쳐 다시 주차해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5시에 와인 테이스팅을 하려면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아서다. 저 멀리 보이는 시에나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오늘의 숙소, 와인 리조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