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여행기, 4일차와 5일차

와인 리조트, 쏟아지는 별, 토스카나의 정수

by Starrwy

[와인 리조트, 카스텔로 디 폰테루톨리]


오늘의 숙소 와인 리조트는 리조트에서 와이너리를 갖고 있는 숙박의 한 형태인데, 고급스러움이 겸비되면 스파 시설까지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묵은 곳은 끼안티 클라시코 지역의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인 Castello di Fonterutoli에 있었다. Castello(성)의 일부 건물을 숙소로 개조한 거라, 부지에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물부터 작은 성당, 포도밭까지 속해 있다. 작은 2층 건물의 1층에는 여러 개 방이 있는데, 그 중 2개 방을 안내받았다.


이게 웬일! 숙소가 너무 좋다.


방은 전부 2인실인데, 객실과 객실을 연결하는 복도에 쉴 만한 공간이라든지, 요리를 할 수 있는 작은 부엌과 공용 냉장고, 다이닝룸 등이 있어 오래 묵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좋을 것 같았다.


잠시 방을 소개하자면, 소파와 책상이 있는 작은 거실 겸 현관이 있고, 중문을 지나면 큰 침대와 옷장이 있는 방이 나온다. 그 안쪽에 샤워 부스가 있는 큰 화장실이 있는 구조. 거실의 창문을 통해서는 멀리 교회의 종탑이 보인다.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와이너리 투어도 있기는 하지만, 와인 테이스팅 프로그램도 운영하기 때문에 굳이 부지를 돌아다닐 필요 없이 오후 5시에 테이스팅만 하고 리조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숙소의 와이너리도 꽤 깊은 역사를 갖고 있었는데, 무려 11세기부터 와인을 납품한 기록이 있고, 본격적인 양조는 1435년부터 25대에 걸쳐 생산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와인에 좀 익숙하다면 들어봤을 지도 모르는 Mazzei 가문 소유의 와이너리다.


우리가 테이스팅한 건 총 3가지 끼안티 와인으로, Fonterutoli, Ser Lapo, Castello Fonterutoli Gran Selezione였다. 22년, 21년 빈티지 정도의 와인들이었는데, 끼안티 와인 특유의 새큼한 맛과 과일향이 여실한 와인들이었다. 테이스팅을 도와준 직원은 와인에 담긴 간단한 설명은 물론, 우리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시원시원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저녁 식사를 예약한 7시까지는 약간 시간이 비어서, 잠시 와인 리조트 부지(폰테루톨리 성)를 산책했다. 등나무꽃과 오렌지자스민, 이름 모를 꽃들이 잔뜩 피어있는 아기자기한 곳. 건물의 지붕 바로 아래에는 칸칸이 제비집이 있어 제비들이 새끼들에게 먹이를 가져다 주느라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돌벽에 난 커다란 초록색 문은 뒤편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마법이 있었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니 심지어 말도 있다. 작은 마방에 갇혀 나가고 싶다는 듯 밖을 쳐다보던 말 한 마리.




길 양 옆으로 커다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길가에서 각자 독사진을 찍었다. 서로의 인생사진을 만들어주려는 듯 이런 저런 디렉팅(?)을 해가며 열심히 찍어줬던 것 같다. 여행을 다녀온 지금 ‘토스카나’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하다.




[저녁 만찬과 별 헤는 밤]


예약한 시간이 되어 길 건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식당엔 우리 보다 먼저 온 한 커플이 있었고, 점원은 레스토랑 코너의 예쁜 원형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해줬다. 물을 마시며 Y와 H가 도착하길 기다리는데, 레스토랑의 통유리창으로 살짝 해 질 녘의 햇빛이 환히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예뻐 보이는 골든 타임이 되었다.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자연과 사물들.



토스카나 요리가 전공인 이 레스토랑에는 이전에 그다지 먹어본 적 없는 식재료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시켜서 다 함께 나눠 먹기로 했다. 그리고 중요한 와인! 가볍게 마실 수 있는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으로 시작해서 조금 전 테이스팅 시간에 시음했던 와인들 중 Castello Fonterutoli를 주문했다. 최근 몇 년 중 작황이 가장 좋았다는 16년 빈티지로 시켜보았다.


기억에 남는 음식은 토끼 고기가 들어간 요리인데, 토끼 고기는 기억이 나는 한 생애 딱 한 번 먹어봤다. 상하이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친구 아버님이 사주셨던 토끼 라구 파스타였는데, 고기에서 흙과 풀향이 났던 것 같다. 여기에서 먹은 고기에서도 미세하게 흙향이 났는데, 그게 토끼고기 특유의 풍미인 듯 하다. 살짝 새콤한 소스가 꽤 잘 어울려서 맛있게 먹었다. 산비둘기 고기를 잘게 다진 일종의 파스타도 시켰는데, 양이 적어서 다들 한 입씩 먹으니 금방 끝났다.




16년 산의 와인은, 낮에 맛봤던 와인과 전혀 다른 와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숙성이 잘 되어 그런지, 입 안에 아주 부드럽게 감기는 것이 목넘김도 아주 깔끔했고, 풍미도 훨씬 깊고 진해서 여운이 짙었다. 같은 와인을 다른 빈티지로 비교해서 마시면서 이렇게까지 강한 차이를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좋은 빈티지와 숙성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이라 의미 있는 공부가 되었다.



마무리로 디저트까지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불렀다. 거의 꽉 찼던 식당의 테이블이 한 두 자리씩 비워지는 걸 보며 우리가 얼마나 즐겁게 저녁 식사를 마쳤는지 알 수 있었다. 식당을 나오니 하늘의 별이 쏟아질 것 같다. 북두칠성은 어딜 가든 눈에 띄어서 반가웠는데, 다른 별들은 뭔지 궁금해서 급히 별자리 앱을 켜봤다. 똑바로 서서 하늘을 쳐다보려니 목이 너무 아파, 숙소 앞 작은 마당에 급기야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별 헤는 밤이다.


돗자리를 깔고 별을 구경하는 우리 옆에 거리를 두고 고양이 한 마리가 자리를 잡았다. 조금 있으니 그녀의 세 아기 고양이 중 한 마리가 슬금슬금 엄마 고양이 옆에 자리를 잡아 우리를 구경하다가 잠이 들었다. 우리는 별도 구경하고 고양이도 구경하며 다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작게 반짝이는 먼지 덩어리. 조금 큰 먼지 입자가 조명을 받아서 빛나는 건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반딧불이였다. 그 깨끗한 곳에만 산다는 반딧불이를 이렇게 지척에서 보다니! 손으로 가둬두고 보니 정말 빛이 깜빡이는 반딧불이가 맞았다. 이 모든 것들이 너무 현실적이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보았던 무지개, 중세 도시, 사이프러스 나무, 쏟아지는 듯한 별, 반딧불이까지.


마치 종합 선물 세트 같았다.
이름은 토스카나의 정수.




[5일차의 아침과 인생조식]


아침 새소리에 일찍 눈이 떠졌다. K도 마찬가지였는지 함께 부지에 산책을 가보기로 했다. 주차장, 작은 성당, 마구간, 사이프러스 길을 지나 포도밭까지 갔다. 넓게 펼쳐진 포도밭을 보니 내 땅도 아닌데 마음이 든든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연둣빛 포도 이파리가 싱그러워보였다.




표지판에 수영장이 쓰여있길래 수영복을 챙겨온 건 아니지만 한번 구경이나 가보자고 의기 합심이 되어 그 방향으로 걷기를 한참. 가도 가도 나오지 않아,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돌아왔다. 길을 잘못 들었던 건지(라고 하기엔 외길) 조금만 더 가면 바로 나오는 건데 직전에 포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운 상태로 그냥 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조깅을 하는 Y 발견! 우리는 그녀의 조언에 따라 큰 길이 있는 곳까지 가보고는 조식을 먹으러 어제 저녁을 먹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원래는 Y, H팀과 각자 페이스에 맞춰 여유롭게 먹고 만나기로 했었는데 마치 약속을 한 듯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되었다. 어제 저녁에는 오픈되지 않았던 야외석이 있길래 나무 아래 있는 자리를 요청했다. 햇살을 받으며 나무 아래에서 먹는 조식이라니. 낭만적이다.



작은 뷔페식으로 되어 있는 조식은 작지만 필요한 건 모두 있는 알찬 구성이었다. 카푸치노 한 잔을 요청한 후 접시에 이것저것 조금씩 담아왔다. 배가 작아 애초에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많은 걸 맛보고 싶었다. 베이커리류는 모두 합격. 특히 초코 크럼블은 아주 맛있었다. 생햄과 치즈, 잼을 올린 호밀빵도 카푸치노와 잘 어울렸다. 치즈의 고소함이 잘 느껴져서 더 좋았다. 레몬맛 요거트가 신기해서 집어왔는데, 신맛의 음식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이었다.


네 명이 모두 감탄했던 음식은 피스타치오 스프레드였다. 큰 보울에 담겨있는 스프레드를 퍼와서 빵에 발라먹었는데, 지금까지는 먹어본 적 없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진한 피스타치오 맛이 일품. 나중에 이것만 따로 살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자기들은 시칠리아의 농장에서 직거래하기 때문에 팔지는 않는다는 대답을 들었다. 바로 이 맛을 다시 맛볼 수는 없겠지만 피스타치오 스프레드를 꼭 한 병 사가자고 함께 이야기했다. 카푸치노를 한 잔씩 리필해서 남은 빵을 마무리하고 과일까지 조금씩 가져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즐겼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 쪽으로 걸어왔다. 리셉션에 잠시 들러 late check-out을 해도 괜찮을지 확인을 받고, 어젯밤 별을 구경했던 숙소 앞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각자 명상 또는 스트레칭하는 시간을 가졌다. 온 사위가 조용하고 새소리만 들리는 나무 그늘 아래. 명상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천천히 나갈 준비를 마치고, 숙소 앞마당의 고양이 일가족에게도 다시 한번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 토스카나여행의 필수 코스, 사이프러스가 길 옆으로 늘어선 막시무스의 집으로 향한다.



[산 퀴리코 도르차]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데, 가까운 곳에 또 멋져 보이는 중세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짧게 나마 잠시 들러보기로 한 후 길도 잘 모르면서 일단 큰 도로에서 빠져나와 도시가 보이는 방향으로 올라갔다. 목적지가 고정된 내비게이션은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냈지만 지금은 잠시 우리 마음대로 하는 시간.


이 도시의 이름은 ‘산 퀴리코 도르차(San quirico d’orcia)’로, 언덕을 올라가자마자 큰 성당 하나가 도시 시작을 알린다. 내부는 규모에 비해 꽤 수수했는데, 가장 안쪽에 그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듯한 큰 그림 두 장이 있었고, 그 중 하나는 굉장히 오래 되어 보였다.



메인 거리를 따라 걸어가며 기념품샵에 잠시 들러 자석 하나를 샀다. 작은 기념품 가게에는 토스카나를 기념할 수 있는 엽서나 에코백 등이 있었는데, 사이프러스 나무를 형상화한 조각이 일정 간격으로 꽂혀 있는 나무 조각상이 꽤 멋있어 보였다.



나는 뻔하지만 여행지에 갈 때마다 그 지역의 랜드마크 조각상이나 자석을 기념품으로 사곤 한다. 그래서 냉장고 한쪽 옆 면은 이미 세계 이곳 저곳에서 모은 자석으로 가득 찼다. 엽서, 또는 샷글래스를 사거나, 티스푼을 사는 지인들도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냉장고에 잔뜩 붙어있는 자석을 하나씩 들여다보자면, 그것을 샀던 순간이나 동네가 잠시 떠오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림으로 그려진 이 자석을 살지 아니면 도자기로 조각된 자석을 살지 끝까지 고민했던 순간이라든지, 시간이 없어 급하게 집어오는 중에도 맘에 드는 걸 고르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 여행 당시의 계절이나 날씨도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잠시 나를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이러한 시간 또한 여행을 다시 한번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잠시 그네도 타고, 정원도 구경하다 보니 목이 말라졌다. 작은 구멍가게가 있길래 들어가봤더니 맥주와 와인, 간단한 스낵을 파는 곳이었다. 로컬 와인이나 직접 제조한 맥주를 팔던 이 가게는 우리 동네에 있었다면 심심할 때마다 가서 앉아있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바깥의 테라스 자리에는 자전거로 여행을 하는 듯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샌드위치로 점심을 드시고 계셨다. 우리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 맥주 몇 잔과 탄산수로 목을 축이며 잠시 앉아있다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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