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엔자와 수도원 숙소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발도르차를 향해 그림 같은 평원을 운전했다. 살짝 구름이 껴서 흐렸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드문드문 파란 하늘이 보일 때마다 설렜다.
완전한 평원 옆 얕은 언덕 위에 있는 빌라 한 채. 집까지 올라가는 길가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서 있는 이국적인 모습이 여러 관광객들의 마음을 흔드는 듯했다. 우리가 근처에 주차했을 때 마침 큰 관광 버스에서 한국인 관광객 무리가 내려서 함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다만 그 집은 사유지라 길의 안쪽까지 들어갈 수는 없고 앞에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토스카나 하면 이 길이 가장 유명하고 이 길하면 토스카나로 통하기 때문에 네 명이 돌아가면서 서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었다. 하지만 인생사진은 무색하게도, 후에 지인 중 하나는 여기에서 찍은 내 사진을 보고 영지를 돌아보는 땅주인 같다는 평을 남겼다.
조금 떨어져 있는 소도시 피엔자에 도착했다. 작은 중세 도시인데 모든 곳곳과 풍광이 다 너무 예뻤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맘에 드는 도시가 어디였냐고 묻는다면 이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커다란 성당이라든지 요새 같은 특별한 관광지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토스카나 특유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갖고 있는 소도시인듯한 느낌을 받았다.
메인 거리 초입부터 천연 재료를 활용한 향수 가게와 라벤더 제품 가게에서 시작해서 작은 가게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데, 하나같이 다 특색 있다. 이번 여행에서 아버지로부터 일종의 특명이 있었는데 예쁜 식탁보가 있으면 사오라는 것. 우리집은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큰집이라 여러 친척들이 오기도 하고, 손님 초대도 가끔 하기 때문에 식탁이 좀 크다. 그래서 부엌/식당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하는 식탁보를 계절이나 이벤트마다 바꾸는 등 신경을 꽤 쓰는 편이다. 예전 남부 프랑스를 여행했을 때도 레몬을 모티브로 한 프로방스 지방 스타일의 식탁보를 사와 여름에 잘 사용하고 있다. 토스카나 역시 린넨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관련 제품을 파는 가게에 가니 과연 특유의 패턴이 있기도 했고, 지역 특색이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모티프로 한 디자인도 꽤 있었다. 다만, 크기에 비례하여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결국 사지는 못했다. 변명(?)을 추가하자면 천의 품질이 좋아서인지 크기가 큰 만큼 무게도 무거워서 돌아가는 캐리어 무게가 걱정되기도 했다. 협탁에 두거나 부엌에 둘 천 정도로 사용할 거라면 금방 구매했을 것 같다.
각자 헤어져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중앙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식탁보를 구경하다가 작은 식료품점에서 화이트 발사믹 식초 한 병과 파스타를 만들 수 있는 식재료 조합을 기념품 겸해서 몇 개 샀다. 말린 허브들과 고추, 마늘, 버섯 등이 시즈닝과 함께 들어있는 봉지였다. 올리브유 두른 팬에 볶다가 파스타를 넣기만 하면 된다고. 종류마다 뒷면에 최적의 레시피가 적혀있어 안심이 되기도 했다. 발사믹 식초는 특히 여름 샐러드에 입맛을 돋우기에 아주 좋은 재료라 원래도 잘 사용하는데, 양질의 식초를 산 듯해서 기뻤다.
전망대가 있다고 해서 중심가를 벗어나 작은 골목을 따라 살짝 내려가봤다. 아까 보다 구름이 조금 더 갠 하늘과 넓은 평야, 드문드문 구릉이 보이는 탁 트인 풍경. 이를 찍은 사진이 아직까지 내 휴대폰 배경화면일 정도로 예쁜 경치가 펼쳐졌다. 경관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사진 찍고, 바라보다가 다시 메인 거리로 올라왔다. 제비들이 부지런히 하늘을 가로지르는 풍경. 너무 멋있다.
코너의 작은 디저트 가게에서 라즈베리 치즈케이크 맛 젤라또를 먹고, 저녁에 와인과 함께 먹을 칸투치 과자를 한 봉지를 샀다. H는 내 젤라또를 한 입 맛보더니 맛있다며 하나 더 사러 갔다. 내가 근처의 와인 가게에서 로컬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사는 사이, K는 오늘 숙소에서 해먹을 음식 재료들-토마토 소스와 향신료 조합, 토스카나 특산품이라고 하는 파스타 종류-를 샀다. 기대된다!
오늘의 숙소는 이번 일정 중에 가장 기대되는 곳. 수영장도 있고 작은 부엌도 있어서 2박을 묵기로 했었다. 13세기부터 베네딕토, 프란치스코회 등의 수도원으로 사용되다가 최근엔 리조트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곳은 산 속 깊은 곳에 있었다. 수도원일 때 올리브유와 비누를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도로에서 부지로 올라가는 길에 올리브 나무들이 잔뜩 있었다. 체크인을 하는 리셉션부터 역사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장소였다. 주차장에서부터 숙소까지 정원이 예쁘게 가꿔져 있었고, 숙소 옆에 있던 수영장은 과장을 조금 보태 마치 천국에 있을 것 같이 아름다웠다.
일단 우리는 짐을 풀고 바로 수영장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 수영장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더해 비키니도 사고, 다이어트도 했는데 결국 그 사이에 너무 많이 먹고 마셔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지만 말이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자칭 물개 K와 수영을 잘은 못하지만 물놀이는 아주 좋아하는 나, 다이빙 자격증까지 준비 중인 H, 물놀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놀 준비는 철저히 해온 Y. 기대하며 물에 발을 담갔더니, 너무 차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짜릿함. 물에 몸 전체를 맡기기까지 10분 이상씩 걸렸지만 결국 다들 재밌게 놀았다. 해먹 튜브가 아주 히트 아이템이었는데, 물 위에 슬쩍 누울 수도, 엎드릴 수도 있어 힘 들이지 않고 둥둥 떠있기 좋았다. 수영장 옆에는 자쿠지도 있다. 우리 외엔 아무도 없어서 마치 전용 풀빌라에 온 것처럼 즐겼다.
며칠 지내면서 수영장 옆에서 느긋하게 책도 읽고 명상도 하고, 수영도 했으면 정말 완벽한 피서가 아닐지. 유럽에 사는 사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이런 곳에 비행기를 13시간씩 타지 않아도 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놀이 뒷정리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오늘의 셰프는 K. 나는 보조다. 레드 와인은 미리 열어두고 부지런히 잔과 접시나 조리 도구를 꺼내 닦아두었다. 바로 파스타를 요리할 수 있도록 큰 냄비에 받아둔 물을 데우고, 지난번 와이너리에서 샀던 올리브유를 꺼냈다. 조리 도구와 기구, 소금 정도는 숙소에 구비되어 있지만 집에서 편히 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았다.
달군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피엔자에서 샀던 향신료 조합을 살짝 볶을 때 온 방에 퍼지던 매콤함! 이탈리아 사람들의 맵부심을 간과한 것이었다. 안에 들어있던 고추는 생각보다 매우 매웠고, 오늘의 셰프는 서둘러 토마토 소스로 매운 맛을 중화시켰다. 신라면도 겨우 먹는 맵찔이인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파스타 면은 토스카나 지역의 전통 파스타인데, 우동면과 비슷한 정도로 두께감이 있는 면이었다.
Y와 H가 방을 건너오고, 화이트 와인으로 본격적인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완성된 파스타에서는 알맞게 익은 면과 신선한 토마토 소스, 허브향이 제대로 느껴졌다. 매콤함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다른 음식들과 함께 먹으니 괜찮았다. 식사와 함께 마셨던 레드 와인 모두 맛있었다. 오늘의 식사를 준비해준 K에게 감사!
얼추 배도 부르고 살짝 취기도 올라오니 벌써 해질녘. 산 속이라 더 빠르게 해가 지는 것도 같았다. 한 손엔 와인잔, 다른 한 손엔 와인병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저 멀리 핑크빛 하늘에서부터 점점 짙어지는 푸른빛이 우리 머리 위까지 이어진다. 이제 조금 뒤에는 별들이 쏟아지겠지.
산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해를 가만히 바라보며 있자니 내가 있는 이곳이 이탈리아라는 게 새삼스럽다. 이 장면 또한 내 마음속 보물함에 들어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