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 돌체 해수욕, 볼게리 도착
본격 고속도로에 진입해 시속 130km로 한 시간 정도를 신나게 달리다가 Autogrill이라는 휴게소에 들렀다. 주유 중인 작은 클래식카가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라면 연상되는 클래식카. 실제로 타고 다니는 걸 보니 신기했다. 차체가 워낙 작아 거의 옆사람과 어깨를 붙인 상태로 운전하게 될 것 같아보였는데, 친밀감이 절로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렌트 업체에서 클래식카를 대여해주기도 하던데 기회가 되면 하루 이틀 정도 해변 마을에 갈 때 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탈리아 고속도로 휴게소는 한국의 휴게소와 비슷해서 화장실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각종 과자나 음료(맥주와 와인까지)를 파는 카페테리아도 있어 간단히 요기를 할 수도 있다. 진열대에 예쁘게 놓인 샌드위치들이 하나같이 다 맛있어 보여 이것저것 다 먹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잠시 환율을 고려해보니 아주 싸지는 않았던 터라 일단 한국에서는 쉽게 먹어보기 어려웠던 버팔로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야채 파니니를 주문해 넷이 나눠 먹었다. 음식을 고르면 따뜻하게 데워주는데, 점원 할아버지께 잘라달라고 손짓을 하니 4개로 잘 분배해주셨다.
K, Y와 H 모두 서로 또래다 보니 듣고 자란 음악도 비슷하여, 운전해서 가는 내내 매번 작은 DJ파티가 벌어졌다. 여자 아이돌 노래 메들리 한번,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아이돌 메들리 한번, 호불호 없는 팝송과 인기곡을 쭉 훑으니 첫번째 목적지 도착이다. 이탈리아 서쪽에 작게 튀어나온 바닷가 ‘아쿠아 돌체(L’aqua Dolce)’. 섬의 동남쪽 해변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바닷가까지 가려면 가파른 계단과 경사를 지나야 한다. 작은 벌레들과 도마뱀이 우리가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파르르 놀라서 도망간다. 멀리서 보이는 바다의 색은 제주 어딘가의 바다와 비슷한 느낌. 짙은 푸른색과 에메랄드 빛을 닮은 푸른색 투톤의 바다다.
해변으로 내려오니 이미 몇몇 그룹들이 일광욕을 하며 듬성듬성 누워있었다. 바다와 멀지 않되 각 무리들과 적당한 거리를 둔 평평한 지대에 가져온 돗자리와 비치타월을 깔았다. 한참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가 다시 일광욕을 하기 위해 누웠다. 바닷가에 눕는 것도 참 오랜만. 나는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수영복을 입지 않았지만, 나머지 3명은 언제든 들어갈 수 있도록 안에 수영복을 입은 상태라, 해가 조금 더 강해지며 더워졌을 때 즈음 돌아가며 바다에 들어갔다.
해변은 자갈과 돌로 이뤄져서, 맨발로 디디면 조금 아팠다. 따가운 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짙은 파랑의 조합은 높은 강도의 시너지를 내서 자꾸 우리를 바다로 불렀다. 나도 바지를 걷어 올리고 잠시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아찔해지는 시원함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때 갑자기 큰 파도 하나가 밀려와 바지가 꽤 젖어버렸다. 다시 주섬주섬 해변으로 나와 바지를 말리며 일광욕 시작.
한편,
이 모든 시간 내내 나는 사실 공터에 세워둔 차가 걱정되어 온전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그옆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 연장들고 우리 차를 털어가면 어쩌지? 우리의 캐리어가 전부 털렸으면 어쩌지? 이제 여행 시작인데, 등 머리속이 혼자 시끄러웠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차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나는 이 소중한 시간을 걱정을 하느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기만 했던 거다. 이건 내 성향과 습관과도 맞닿아 있다. 그래서 늘 스스로에게 되뇌는 구절, ‘지금 이 순간을 가져라(Seize the moment)’가 절실히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걸 여행 초반에 깨달았다는 사실. 나는 혼자도 아니고, 함께 이겨낼 친구들도 있으니 앞으로는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목표이자 규칙을 만들었다. 즐기기만 하자!
[볼게리로]
다시 한시간 반 정도를 달려 숙소가 위치한 볼게리(Bolgheri)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집을 통째로 빌렸는데, 방도 세 개에 화장실도 두 개. 부엌과 다이닝 공간도 꽤 넓었다. 아래층에 부엌과 식탁, 작은 소파, 화장실이 하나 있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방 세 개와 화장실이 있는 구조. 장시간 운전한 나를 배려해줘서 혼자 방을 쓸 수 있게 해줬다. 잠시 짐을 풀고 비대면으로 서류 등을 처리한 다음 근처의 마트로 향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Conad가 있어서 장바구니를 달랑 들고 쫓아갔다.
나는 어떤 나라를 가든 그 나라의 슈퍼마켓/마트에 가는 걸 매우 좋아한다. 새로운 걸 먹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 나라 사람들이 주로 먹는 게 우리랑 뭐가 다른지 보는 것도 좋아한다. 일단 마트의 초입부터 눈에 띄는 멜론! 한국에서 보통 많이 먹는 머스크 멜론과는 다르게 생긴 칸탈로프 메론을 한 통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대망의 납작 복숭아! 이상하게 이전의 유럽 여행에서 납작 복숭아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 과연 명성대로 맛있을지 궁금해하며 장바구니에 몇 알 추가. 체리도 한 바구니 넣고, 사과도 한 알 넣는다. 살라미와 프로슈토 코너에 가니 먹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조금씩 잘라 장바구니에 넣고, 와인과 함께 먹을 올리브와 치즈도 추가했다.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과 작은 크래커, 와인도 몇 병 넣었더니 들고가기엔 짐이 꽤 무거워졌다. 우리의 센스쟁이 Y가 다시 숙소에 가 차를 가져와주었다!
숙소 주인에게 괜찮은 식당을 몇 개 추천 받았는데, 전화를 해보니 주말이라 이미 대부분 예약이 꽉 찬 상태였다. 다행히 한 곳의 실내 테이블을 예약할 수 있었는데,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고! 잠시 상태를 재정비 한 다음 레스토랑으로 출발했다. 숙소보다 조금 더 해변에 가까운 레스토랑.
시간이 조금 남아 잠깐 들른 이곳의 바닷가는 아쿠아 돌체와는 다르게 모래 해변인데,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낮에는 파라솔이 촘촘히 펴지는 듯 한데, 우리가 갔을 때는 아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파라솔들이 다 접혀 있었다. 그것조차 나름의 운치가 있는 듯했다.
잠시 파도 소리와 해질녘의 경치를 즐기다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운이 좋게 얻은 마지막 자리. 예약이 꽉 차서 테라스 석은 앉을 수 없고 가장 안쪽의 한 테이블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나름대로 아늑한 느낌이 들어 괜찮았다.
이탈리아 도착 후 아직 제대로 된 음식(proper hot meal)을 먹지 못했던 터라, 다들 열의가 대단했다. 차갑게 식힌 로컬 화이트 와인은 식전주로도 훌륭했고, 식사를 하면서 음식과 페어링도 꽤 좋았다. 볼게리 지역의 와인이었다.
메뉴판에 ‘깔라마리’라고 적혀 있어, 오징어 튀김인 줄 알고 시켰는데 음식이 나오고 보니 깔라마리는 오징어 튀김이 아니라 오징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오징어를 살짝 데쳐 당근, 애호박, 소스와 함께 먹는 음식으로, 애피타이저로 아주 딱이었다. 술과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니 여행온 듯한 기분이 배가 돼 더 기분이 좋아졌다.
두 가지 종류의 고기 파스타와 소고기 스테이크까지 나와 파스타를 한참 먹고 있자니, 담당 서버가 파르메지아노 치즈 가루를 좀 갖다줄지 물어온다. ‘파르메지아노~’를 정확히 발음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건지, 계속 강조해서 말하길래 슬쩍 따라했더니 아주 잘 한다며 이탈리아 사람이냐는 농담을 한다. 치즈 가루를 뿌렸더니 파스타 맛의 농도가 더 짙어졌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그 서버는 레스토랑에서 특별히 만든 칠리 오일이 있다며 가져다 주었다. 마치 한국 버전으로 따지자면 우리 식당 특제 참기름 같은 느낌이라서 재미있었다. 고추 기름이라고 하기엔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매운 맛이 훨씬 덜 한 대신 신선한 맛이 강했다. 파스타에 톡톡 올렸더니 색다른 맛이 첨가되어 다채롭게 식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원래는 해변에서 노을을 보고 싶었지만, 식사 시간이 꽤 길어져서 보지는 못했다. 시시각각 검어지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마트에서 샀던 간단한 안주들과 프로세코 와인으로 2차 시작. 프로슈토와 살라미는 정말 정말 맛있었다. 짜지도 않고 적당한 기름으로 고소한 맛이 가득. 다만 올리브는 조금 짜서 하나를 먹고는 손을 댈 수 없었다.
벌써 3일차. 시차 때문인지 새벽에 일찍 깬다. 하지만 일어나고 싶지는 않아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배가 고파 아래층으로 향했다. 부지런한 Y는 비치타올을 펴놓고 운동 중이다. 갓생…! 그 와중에 테라스 뷰가 속된 말로 미쳤다. 마침 깨서 내려온 H와 테라스에 앉아 아침을 먹자며 부엌에서 음식들을 주섬주섬 꺼내 왔다.
어제 저녁에 먹었던 멜론과 체리, 프로슈토와 과자, 새로 내린 커피와 피스타치오맛 요거트. 테라스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한 상 차려놓고는 일단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굉장한 카페인 중독으로, 오전 시간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곧잘 머리가 아프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말수도 줄어든다. 부엌에 작은 캡슐 머신이 있어 다행이었다. 약간은 시원한 기온에 밖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자니 기분이 너무 좋다. 저 멀리 있는 나무에서 새들이 한참 시끄럽게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 또한 낭만이리라.
피스타치오맛 요거트는 처음인데, 피스타치오의 고소한 향에 달달한 맛이 합쳐진 요거트였다. 신기한데 맛있었다. 토스카나의 어딜 가든 피스타치오가 굉장히 많이 보였는데, 듣자하니 시칠리아가 유명한 피스타치오 산지라고 한다. 과거 로마 사람들이 중동에서 피스타치오를 들여왔고, 이후 중세 시대에 아랍 사람들이 시칠리아를 점거하며 대규모 농사를 지은 영향이라고 한다. 특히 검은 화산 토양이 피스타치오 재배에 도움이 되었다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니 K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운동을 마친 Y도 함께 아침을 먹기엔 테라스가 좁아 식탁에 다시 아침상을 차렸다. K는 요리가 취미에, 실력도 갖춘 인재라서 그 자리에서 큰 유리컵에 갖은 과일들을 조각내고 어제 마트에서 사온 플레인 요거트를 층층이 얹어, 보기만 해도 싱그러운 과일 요거트볼을 만들었다. 나는 그 사이 납작 복숭아와 일반 복숭아, 사과 등을 더 집어 먹다가 배가 너무 불러서 옆에서 구경만 열심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