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품 쇼핑과 마지막 밤의 컨디션 난조
오늘은 피렌체에서 개인 시간을 보내기로 한 날.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 다 다를 수 있어서다. 각자 기념품 쇼핑도 하고 피렌체를 관광하다가 저녁엔 다같이 만나 노을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는 가장 먼저 어제 지나가며 눈여겨봤던 아기용품 파는 가게에 들렀다. 올망졸망한 아기 옷들이 성별과 연령대 별로 진열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다 너무 귀엽다. 수완 좋은 점원은 내가 옷 하나를 진열대에서 꺼내들면 그것과 같이 코디하면 좋을 모자를 꺼내오거나, 조금 스타일이 다른 비슷한 옷을 같이 꺼내며 내 마음(과 지갑)을 흔들어댔다. 예쁜 게 너무 많아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고심하다 세일러복 스타일의 반바지 우주복을 골랐다. 옷감이 살짝 도톰해서 한여름에는 어차피 못 입을 것 같아 가을에 입을 수 있도록 조금 큰 사이즈를 샀다. 이걸 입을 조카를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벌써 좋았다.
첫 번째 기념품을 구입하고난 뒤 한 블록 떨어져 있는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el Carmine 에 들렀다. 시내랑은 조금 떨어져 있어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당의 규모 자체는 굉장히 커서 화려한 내부를 돌아보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소요됐다. 검색을 해보니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가는 데 별다른 입장료가 있지는 않지만, 잘 보전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약소하나마 동전 몇 개를 기부했다. 곳곳에 성인들의 동상들도 있고 구역마다 기도할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있어,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신앙심이 아주 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여행지에서는 진심어린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된다. 물론 염원도 담고. 먼 미래의 일인 것 같아 살짝 거창해보이긴 하지만 이 삶을 마칠 때 후회나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길.
성당 밖을 나와 주거 지역을 통과하여 시내로 걸어 내려간다. 가게를 오픈하거나,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들. 우선은 카페인과 당을 좀 충전해야겠다. 급한 대로 근처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와 피스타치오 크림이 들어간 과자를 주문했다. 커피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과자는 풍미가 적고 편히 먹기에는 좀 단단해 기대보다 실망스러웠다.
그리곤 가죽 장갑을 사기 위해 Madova 매장에 들렀다. 나도 그렇고 어머니도 겨울에 장갑을 애용하는데, 어머니가 예전 지인분이 피렌체에 다녀온 기념이라며 주신 가죽 장갑을 한참 쓰시다가 한 쪽을 잃어버린 뒤로 안 쓰고 계셨던 게 생각이 났기 때문.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맞이해주신다. 손의 크기를 유심히 보더니 사이즈 확인을 위해 샘플을 하나 껴보라고 한다. 나는 꽤 손이 작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성용품은 손가락이 많이 남는데, 샘플은 내 손에도 크지 않고 딱 맞아 좋았다. 어머니도 내 손과 비슷한 사이즈기 때문에 괜찮을 듯 했다. 이제 안감이 실크인 것과 캐시미어로 된 것 중 고르면 되는데, 잘 알지는 못하지만 괜히 관리하기엔 실크가 더 나을 것 같아 실크를 골랐다. 그 다음 과정이 매우 놀라운데, 내 사이즈에 해당하는 장갑을 적어도 50여 개 이상 전부 꺼내 보여준다. 무난한 색부터 정말 쨍한 색상까지 다양했다. 장갑에 힘을 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일단 비교적 무난해보이는 색상으로 대여섯 개 골랐다. 나의 최종 픽은 올리브색, 버건디, 짙은 회색. 서울에 도착하고 나면 각자 제 주인을 찾아갈 거다.
관광객들로 빼곡한 베키오 다리를 건너 시내로 넘어왔다. 이번엔 아버지를 위한 선물. 유튜버 밀라논나에 의하면, 밀라노는 여성복 중심이고 피렌체는 남성복 중심이라고 한다. 그 말마따나 곳곳에 tailor 샵도 있고 이미 만들어둔 옷을 파는 매장도 다양했다. 보통의 아버지와 달리 나의 아버지는 본인만의 패션 기준이 있어서, 그 분의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는 게 늘 어려웠었다. 그래서 가급적 기존에 자주 입으시는 스타일에서 약간 다른 제품을 고르고 싶었는데, 마침 린넨으로 된 파란 스트라이프 셔츠가 눈에 띄었다. 점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함께 입으면 좋을 면바지를 추천해주었는데, 여름에 편히 입으실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구매했다. 교환/환불도 안 되는 마당에 모험을 한 듯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과연 이 선물들이 용도를 다해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고는 나를 위한 선물. 산타마리아 노벨라에 들러 이번 여행을 기념하기 위한 향수 ‘안젤리 디 피렌체’를 구입했다. 이름부터 이번 여행을 기억하기에 딱인데, 복숭아, 오렌지 탑노트의 시원한 향이라 여름에 쓰기에도 좋을 것 같다. 이 향수를 뿌릴 때마다 올해의 여행 생각이 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다음으론 피렌체에서 꼭 들르고 싶었던 와인 윈도우를 찾아나섰다. 건물 외벽에 난 작은 창문으로 잔 단위의 와인을 사마실 수 있는 시스템(?)인데, 1600년 대에 전염병이 피렌체를 강타했을 당시 사람과의 접촉을 줄이(며 와인을 마시)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285개에 달하는 와인 윈도우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상당수가 아직까지 운영되고 있다고.
벽에 난 작은 창문 옆에 종(bell)이 있어서 종을 울리면 창문이 열리며 점원이 레드 또는 화이트를 고르라고 한다. 다시 문이 닫혔다가 준비된 와인을 창을 통해 건네주는데, 피렌체에서만 해볼 수 있는 것 같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했더니, 정말 점원이 종을 울리며 창문으로 잔을 전해주었다. 일련의 과정이 직접 해보니 더 재미있었다. 그 앞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마자 미국인 관광객들이 버스에서 우르르 내려 창문 앞으로 줄을 섰다. 나만 해보고 싶은 건 아니었구나!
K와 Y가 근처의 중앙 시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와인을 마신 후 부리나케 달려갔다. 시장의 윗 층엔 펍과 음식을 파는 가판대, 넓은 자리가 있어서 가볍게 술을 한 잔 하거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호박꽃 튀김과 피자를 그녀들이 미리 사두어서 맛있게 먹었다. 잠깐 떨어져 있었던 건데, 그 사이에 각자 겪은 일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게 많아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식사 후 1층의 가게에서 다함께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할 발사믹 식초와 트러플 소금, 파스타 등을 샀다. 너무나 친절한 주인은 숙성 기간별로 발사믹 식초를 다양하게 맛보여줬다. 발사믹 식초는 구매하지 않을 거라 맛보는 게 미안할 정도였는데, 매장을 나오며 다시 한번 감사를 전했다.
활기찬 시장을 뒤로 하고 다함께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오후의 카페인을 충전했다. 여기서부터 K는 도서관에 가보기로 하고, 나와 Y는 쇼핑을 하기 위해 헤어졌다. 평생을 입을 각오(?)로 막스마라의 스테디 셀러 코트를 샀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에 패딩을 주로 입긴 하지만, 가끔 격식을 갖춰야 하는 경우에 입을 옷이 마땅치않았다는 이유를 더해본다. 아직 한여름이 오지도 않은 6월 초, 이 코트를 입을 수 있는 계절이 오려면 한참 남았다는 게 아쉽지만 ‘평생’을 기약하며 산 건데 반 년 정도야 금방 기다릴 수 있을 거다. 여하튼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근처에 무려 1733년에 문을 연 카페 Caffe Gilli가 있어 들렀다. 매우 고풍스러운 내부. 칵테일 한 잔씩을 시켜 잠시 더운 열기를 식혔다. Y는 오전에 이미 이 카페에 한번 와서 모닝 커피를 즐겼지만 고맙게도 다시 한번 들러주었다. 사람이 많아 계산을 마치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근처 광장의 기념품샵에서 귀걸이를 한 쌍 사면서 진짜 마지막 기념품 쇼핑을 끝냈다.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 오후까지 각자 개인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숙소에 모여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노을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저녁을 겸해 몇가지 음식과 와인을 싸가기로. 나와 Y가 쇼핑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온 건 다함께 만나기로 약속한 때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 그런데 숙소에 들어가 짐을 내리자마자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이탈리아 더위에 아침부터 쇼핑한 물건들을 이고 지고 다니면서 땡볕을 받았더니 황당하게도 더위를 먹었던 것.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도통 열이 가라앉지 않는 게 느껴졌다. 시원한 물도 마셔보고 미지근한 샤워도 해보며 컨디션을 조절해봤다. 처음보단 나아졌지만 이 몸상태론 도저히 밖에 나갈 수는 없을 듯해 나는 숙소에서 따로 쉬기로 했다. 미켈란젤로 언덕 자체는 예전에 가봐서 아쉬울 건 없었지만 이 조합으로 함께 가지 못한 건 아쉬웠다. 더군다나 오늘이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더 아쉬웠다.
한참 노을(과 와인)을 즐기고 숙소로 들어오는 일행의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금 자고 나니 컨디션은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고,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아서 언덕을 다녀오며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들으며 다같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은 체크아웃하고 바로 로마로 가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