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이탈리아 북부 여행. #1-1 베네치아

베네치아 도착, 치케티,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by Starrwy

[ 출발과 환승 ]


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시간에 맞춰 나왔더니 퇴근 러시아워를 맞닥뜨렸다. 리무진 버스가 강변북로에서 도통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기사님의 어깨 너머 들렸던 무전에 의하면 평소보다 조금 더 막힌다고 한다. 평소보다 조금 더 한 게 또 있었다. 여행 전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떨림.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터다.


1) 리무진 버스 정류장까지 차로 데려다주신 아빠가 혼자 계실 생각에 갑자기 조금 외로워지셨는지 헤어질 때 조금 투정을 부리셨기 때문

2) 연로하신 다른 가족들의 컨디션이 조금씩 좋지 않아지고 있는 것이 걱정으로 남아있기 때문

3) 이번 여행의 많은 부분을 내가 책임져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일지도,

4) 현지에 가지 않고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항목들을 결국 통제하지 못했을 때의 아쉬움과 분노(?)를 내 몫 뿐 아니라 엄마의 몫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을 많이 준비하고, 또 고대했었는데 그 시작에 이런 불편한 감정이 드니, 갑자기 여행을 왜 하는 건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를 긴장 상황에 몰아넣고 싶은 걸까? 그걸 바란 것은 절대 아닐 거다. 나는 어느 순간에도 갈등없는 상황을 바라는 평화의 수호자니까.


나는 이 불편한 떨림을 감수하고
왜 늘 떠나고 싶어하는 걸까?
여행이 나에게 대체 무엇을 주기에?
가능하다면 이번 여행에서 그 대답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여튼, 부디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 되기를.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들도 무사히 계시길.




[ 비행 시작 ]


10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을 견디기 위해 넷플릭스와 유튜브 영상을 여러 편 다운받아 왔다. 시간을 좀 보내보고자 무선 이어폰 본체 뚜껑을 열었더니 왼쪽 이어폰이 없다. 평소에 물건 간수를 잘 하는 편인지라 의아해하며 가방을 샅샅이 뒤졌는데 정말 아무데도 없다. 아까 라운지에서 충전하다가 본체를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그 하나가 탈출한 모양이다. 가져온 영상은 못 보고 아쉬운대로 비행기에서 나눠받은 이어폰으로 기내 영화를 몇 편 연달아 보니, 남은 시간이 조금씩 줄어든다.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간으로 해가 어슴프레 떠오른 새벽. 비가 와서인지 분위기는 한층 고요하다. 입국 수속 후에 베네치아를 여행하기 위한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마쳤는데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간단히 커피 한잔을 하기 위해 카페 창가에 앉았다. 엄마는 아메리카노, 나는 카푸치노로 적은 수면 시간을 보충해본다. 커피와 애플파이를 먹으며 이번 여행에서 엄마가 가장 기대하는 부분이 무언지 여쭤보았다. 엄마는 돌로미티에 가서 대자연을 보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다행이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베네치아에 가기 위해 탄 두번째 비행기는 작은 공간에 3*3의 좌석을 꽉꽉 채웠는데, 마르코폴로 공항까지는 약 2시간 정도 걸린다. 제 시간에 모든 승객이 탑승은 마쳤지만 짐을 싣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짐들을 전부 내렸다가 다시 싣는 상황이 발생한데다, 공항 내 서류 승인 이슈로 출발이 한시간 가량 늦어졌다. 흰머리의 비중이 검은 머리보다 많으신 스튜어드는 이런 상황을 설명하며 여러 이야깃거리들을 꺼내셨다. 과거 파일럿이셨다며 본인의 오래된 파일럿 모자를 승객들에 보여주었다. 소중히 간직해오신 게 분명했다. 그 특별함을 승객들이 경험해볼 수 있도록 앞자리에서 뒤편으로 넘기겠다고 하며 소중히 대해달라고 이야기했다. 이 모자는 저 분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 나에게도 저 정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물건이 있을까?


밀려오는 피곤함에 잠시 눈을 감은 사이 비행기는 활주로로 이동했고, 이내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을 뚫고 상공으로 올랐다. 구름이 마치 도로인 것처럼 그 위를 날아간다. 어느 순간부터는 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지면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등장한 산악 지역. 도착 시간이 가까워진 걸 보니 알프스인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방문할 곳. 두근거린다.


기장은 늦은 출발을 따라잡기 위해 더 빠르게 비행기를 몰겠다고 했다. 그래서 원래 도착 시간에서 크게 차이나지 않게 도착했다. 비행기가 작아서인지 위탁했던 수하물도 금방 나왔다.




[ 베네치아 도착, 그리고 세기의 결혼]


베네치아에서는 반나절 정도밖에 관광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바로 택시를 타고 호텔에 가기로 했다. 택시 스탠드에 목적지에 따라 금액이 크게 적혀 있어 바가지 걱정은 없었다. 일반 승용차보다 큰 택시에 타게 돼서 비용을 더 받을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택시가 출발을 하자마자 기사는 현재 베네치아, 어쩌면 이탈리아에서 가장 핫 이슈인 ‘세기의 결혼’ 이야기 보따리를 꺼냈다. 세계 3위 부자, 아마존 CEO 의 결혼식인데, 택시기사 말에 의하면 그 결혼에 참여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전세기 80여대가 와있어 지금 베네치아 공항에 주차할 곳이 없다고 한다. 베이조스는 100미터가 넘는 요트를 타고 바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파티를 벌이고 있다고. 빌게이츠 같은 억만장자 뿐 아니라 배우, 연예인 같은 유명인도 여럿 초대되어 더 많은 관심이 쏟아지는 것 같다고 한다. 몸값이 높은 사람들이 몰려서인지 사설 보안업체도 굉장히 많이 왔다는데, 그래서 오히려 가장 안전한 베네치아에 온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베이조스가 베네치아에 지불한 금액은 베네치아 일년 관광 매출의 약 60%에 해당한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 자본의 힘이란 대단하다. 1초에도 몇 억씩 번다는 베이조스는 대체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걸지 상상이 안 됐다.




택시 기사는 그 소식 외에도 베네치아 여행에 대해 여러 팁들을 줬는데, 산 마르코 광장까지 갈 때 수상버스를 타고가서 다시 복귀할 때는 곤돌라를 타라는 것. 돌로미티-코르티나와 특히 코르바라-에 갈 예정이라고 하니 코르바라는 과거 오스트리아 지역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탈리아어보다 독일어를 많이 쓴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와인을 꼭 맛보라며 그 지역에서 생산하는 프로세코와 게뷔르츠마이너를 추천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본인의 아내가 오늘 넷플릭스에 공개되는 오징어 게임 시즌 3를 아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여행 다니는 내내 서로 이야기를 하며 오징어 게임을 언급하는 외국인들이 꽤 보여서, 이 시리즈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호텔에서의 체크인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고, 정리된 방이 있었는지 얼리 체크인이 가능해서 짐도 방 내부에 들여놓았다. 이제 베네치아 본섬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5분 정도 걸어가는데 그 잠깐 사이에 피부에 와닿은 햇살이 꽤나 따갑다. 이 열기... 작년에도 한번 호되게 당했으면서 여름의 이탈리아를 간과해버렸다.



[ 베네치아 본섬으로 ]


키오스크를 통해 기차표를 두 장 사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들뜬 표정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지정좌석은 아니어서 빈 자리를 찾아 앉기를 잠시, 기차는 마치 바다 표면을 달리는 듯 하다. 저 멀리 파란 바다 위 마치 요새 같이 늘어선 베네치아섬의 주황빛 건물들.


산타마리아 역을 나오니 운하와 그를 둘러싼 역사가 느껴지는 건물들, 그리고 선착장이 보인다. 운하 건너편의 커다란 성당은 마치 우리를 일상에서 단절시키며 ‘그래, 여기는 베네치아야. 몇 백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지. 마음의 준비를 해’라고 말하는 듯 했다.



[ 치케티와 젤라또 ]


시간은 이미 1시가 넘은 시점. 본격적인 베네치아 관광 시작 전에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했다. 역에서 도보 10분 정도 거리에 알베르토가 추천한 치케티 집이 있어 가보기로 했다. 운하를 건너 관광지가 아닌 뒷골목으로 들어오자 시끌시끌했던 주위가 조용해지고 운치는 한층 더해졌다.


운하 바로 옆에 위치한 ‘바카레토 다 렐레‘는 매장 내부는 매우 좁지만 바깥에 잠시 서있을 수 있도록 배럴통이 두어 개 놓여있었다. 치케티는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이자 전통 핑거푸드로, 가게에는 소시지, 살라미, 프로슈토, 치즈, 버섯 등이 조합된 여러 종류가 있었다. 치케티를 엄마와 나 각자 하나씩 고르고, 날이 더워 화이트 와인 두 종류를 함께 주문하여 바깥에 자리를 잡았다. 피노 그리지오와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 로컬 와인이 작은 유리잔에 서빙되었다. 피노 그리지오의 상큼함과 적당한 당도가 더위를 잠시 잊게 해주어 아주 만족스러웠다. 치케티는 빵이 조금 단단한 편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맛있었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걸어서 25분 정도 걸린다.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들을 따라 걸어간다. 뒷골목으로 걸어다니니 관광객이나 호객꾼이 적어서 좋다. 해를 받을 때는 아주 덥지만 그늘로 들어오면 그래도 시원해서 건물들 사이를 걸을 때는 크게 지치지 않았다. 창문마다 꽃화분이 달린 건물들이 운하 양옆으로 늘어선 배경이 이국적이면서 예쁘다. 이렇게 꼬불꼬불한 길을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외우겠지? 잠시 한눈을 팔면 금방 길을 잃을 것 같았다. 그것도 낭만이겠지만.




걷다보니 마주한 작은 상점가. 날도 덥고, 입이 텁텁했던 터라 젤라또를 먹기로 했다. 나는 우유와 블랙 체리 맛인 아마로네, 엄마는 초코칩이 들어간 우유맛을 선택했다. 시원하고 부드러우면서 밀도 있는 질감이 마음에 들었다.



여행에서는 뭔가를 참기보다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고 싶은 일을 바로 바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즐거운 걸까? 새로운 장면들을 마주하고,
조금 더 본능에 가까운 일들을 했을 뿐인데 그저 좋다.
특별한 걱정 없이 바로 다음 행선지라는 눈앞의 목표만 좇아도 되는
그런 종류의 편안함.



[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


좁은 골목들을 지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도착했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티켓은 살 수 있었고, 짐 보관함에 가방을 맡기고 나서 돌아보기로 했다. 정원의 작품들을 먼저 보고 내부 작품을 보는 흐름이었는데, 큰 나무들이 우거져서 만든 그늘이 작품들과 조화롭게 어울렸다. 이 미술관에 오기를 너무나 기대했던 엄마는 거의 모든 작품을 눈과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셨다.


정원 한 켠엔 페기 구겐하임이 반려견들과 함께 묻혀있었다. 이 곳은 실제로 그녀가 거주했던 궁전을 그녀 사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거라는데, 그녀는 살던 집 한 켠에 묻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의 진가를 이해해주는 방문자들을 끊임없이 반기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성공한 삶의 하나가 아닐지 싶다. 그 큰 정원과 집 곳곳에 현대미술 작품들이 빼곡하게 걸려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Robert Mangold의 기하학적인 작품이었는데, 색감과 그림의 단순한 형태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GPT에 따르면 이 작품은 기하학과 색채, 선의 조화에 집중한 미니멀리즘 회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며, 단순한 형태 속에 구조적 긴장감과 시각적 리듬을 담아내는 작가 특유의 언어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감각과 질서를 동시에 표현하려고 했다는데, 생동감있는 색과 그 면적, 도형들이 맞물리는 방식들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 듯 했다. 사실 상당 부분의 작품이 우울/침울한 색감으로 표현되어 조금 지겨워지고 있었다. 이 현대 사회의 힘듦을 일정 부분 담고 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그러던 찰나 밝고 생생한 컬러감의 작품을 봐서 기뻤던 것 같기도 하다. 여행의 초반, 조금 지쳤던 일상을 잊고 밝은 부분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 외에 그랜드 운하쪽의 궁전 외부 공간에도 몇 가지 작품들이 있었는데, 말을 모티프로 한 조각들이 흑백의 공간과 잘 어우러졌다. 전시관 곳곳에 작품 같은 가구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실제 사용했었을 것 같은 작품 같았다. 세월과 사용감이 느껴지면서도 우아함이 돋보였다.



한편, 전시를 보는 중에 목이 너무 말라왔다. 생각해보니 물을 마신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미술관 내부에 카페가 있어 더위도 식히고 목도 축이기 위해 들렀다. 물도 주문하고, 샤케라또를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했지만, 샤케라또가 가장 비슷한 아이스 커피라며 추천을 받았다. 샤케라또는 만드는 과정에서 커피와 얼음을 흔들기 때문에 거품이 많았다. 그 점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원함에 몇 입만에 다 마셔버렸다. 유리 통창의 카페는 아주 시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더위를 피하기에는 적절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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