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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y 20. 2022

회사가 그리워질 수도 있을까?

제주 한달살기처럼 돌아가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그토록 바라던 제주 한달살기를 시작했습니다.
숙소는 정말 깔끔하고 아늑하며,
아름다운 정원과 그 너머의 바다까지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완벽한데..
불과 일주일 만에 집이 조금 그리워집니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후 남편과 내가 가장 먼저 합의한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제주 한달살기였다. 당분간은 정말 충분히 쉬어 보기로 했지만, 마음이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았나 보다. 유튜브에서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번다더라 하는 컨텐츠만 주말 내내 보는 서로를 발견하고는 쫄리냐며 한참을 웃었다. 어딘가로 떠나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라진 일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필 제주 한달살기를 결정한 이유는 회사에 다니면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또 그간 제주 여행을 할 때마다 ‘언젠가 직장을 그만두면 제주에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오던 차라, 이번 기회에 여행이 아닌 사는 곳으로서의 제주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어렵게 고른 숙소는 도착하자마자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다. 홍보 사진은 오히려 실제 풍광에 못 미치는 느낌이었다. 사진보다 훨씬 근사한 바다 전망을 갖고 있었고, 정원도 아름다웠다. 숙소 내부는 준공한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새집처럼 깔끔했다. 나는 제주도에서 ‘사는'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침구와 조리도구, 양념류, 밑반찬, 캠핑용 테이블과 의자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내 물건들로 채워 넣고 나니, ‘정말 내가 한 달 동안 살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가 아닌 ‘집’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레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여행자로서 여기저기 관광하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제주에 사는 동생 내외와 하루 나들이한 것을 제외하면, 첫 주는 일부러 거의 집에서 보냈다. 되도록 식사도 집에서 먹고, 집 앞 정원을 산책하고, 주변 해안도로를 걷는 것으로 소일했다. 드라마 몰아보기도 하고,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정원에 지어진 원두막 그늘에서 식사하며 마당이 있는 집을 꿈꿨다.

둘째 주부터는 간간이 외출도 했다. 집에 있어도 외출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니까. 즉흥적으로 그날의 할 일을 정했다. 올레길을 따라 몇 시간씩 걷거나, 비자림에 가서 가이드 투어를 하고, 성산일출봉과 제주민속촌도 다녀왔다. 바다가 보이는 사찰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108배를 하고, 여기저기서 추천받은 맛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여전히 집 앞 정원은 우리의 카페였다가, 레스토랑이었다가, 산책로가 돼 주었다. 해안로를 따라 걷는 산책은 한적한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벌써 수년째 제주도에 거주 중인 동생이 이렇게 좋은 날씨가 이어진 건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바람도 심하지 않고, 흐리지 않은 맑은 날씨였다. 집은 호화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층 집에 살아보고 싶었던 로망을 채워주었고, 세대 수가 적어 프라이버시 걱정 없이 정원이나 수영장을 한적하게 즐길 수 있었다. 때때로 멍 때리며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몰아보는 여유. 굳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없는 일상.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잠자리가 불편해졌다. 내가 가져온 베개와 스프레드, 이불로 우리 집처럼 세팅했어도 우리 침대는 아니었다. 챙겨 온 블루투스 스피커로는 우리 집 거실에서 듣던 음악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요리하다 보면 챙겨 온 몇 가지 조리도구의 쓸모보다, 두고 온 자주 쓰지도 않았던 한 가지가 간절해졌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다 보면 집에 있는 예쁜 유리컵이 생각나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 접시가 그리웠다. 정원을 거닐다 튼튼하게 자라는 허브들을 보면 우리 집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은 무사할까 걱정이 됐다.

아, 우리 집이 그리웠다. 저녁 시간 남편과 맥주잔을 기울이다, 둘 다 말이 없어진 어느 순간에 서로 알아차렸다. “당신도 집이 그립지?”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제주 한달살기를 하고 있건만, 이 순간의 즐거움과 감사함보다 그리움이 커지는 순간들이 늘어가는 것이 허무했다. 여행이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떠나기 전의 설렘에 눈이 멀어 있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아 질 것을 걱정했다. 역시 떠나봐야 알게 되는 것일까. 언젠가 해외 도시 한달살기 일주를 하자던 계획은 전면 취소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퇴사는 어떨까? 회사를 떠나왔는데, 다시 그리워질 수도 있을까? 돌아갈 나의 집은 있지만, 회사는 돌아갈 수 없는데. 문득 두렵다. 이제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 내 텅장보다, 내 마음이 비어버릴까 봐 너무나 무섭다. 나는 퇴사하면서 내 마음을 좋은 것들로, 건강하게 채우고 싶었는데. 막상 퇴사로 인해 내 마음이 더 비어 버리면 어떡하나. 나도 깨닫지 못했지만, 회사가 채우는 부분이 더 많았던 것은 아닐까.

불과 한 달 만에 좋았던 기억들만 남아 버렸나. 동료들과의 관계, 일하면서 느낀 성취감과 보람, 동료들의 인정과 격려, 나와 후배의 성장에서 느꼈던 기쁨. 회사를 떠날 때 어느 선배님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지나간 시간은 좋은 기억만 남는다고, 그래서 과거를 더 미화하고 후회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좋은 기억은 그냥 추억으로 두고, 더 앞으로 나아가라고. 절대 돌아보지 말라고.

밤 산책을 하며 남편에게 우리도 후회하면 어떡하냐고 물었다. 남편은 용기를 줬다. “당신은 뭐든 잘 해낼 거고, 또 잘 해낼 방법을 찾을 것 같아. 당신은 뭘 해도 망하진 않을 것 같아. 내가 그거 믿고 사표 냈잖아!”


근데, 여보...
그 길 나 혼자 찾아야 하는 거 아니지?
나 이상하게 요즘 어깨가 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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