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몇 학년이야?”
요즘 아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자라던 시절 놀이터에서 다툼이 날 것 같으면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말은 늘 이거였다.
시장에서는 “얼마예요?”가 자연스럽고,
놀이터에서는 “몇 학년이야?”가 당연했다.
한 번은 외할머니네 댁 근처 문방구 앞 오락기 한 대를 두고
덩치가 큰 아이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다.
상대는 딱 봐도 덩치가 배는 큰 본인이 이길 것이라 예상했겠지만
방심하지 않고 처음부터 궁극기를 시전 한다.
"너 몇 학년인데?"
나보다 학년도 높아 보였지만
지기 싫은 마음에 나 또한 목청을 높인다.
나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나 형 있어!”
그러자 그 애는 멈칫하는 듯싶더니
“형은 몇 학년인데!”
로 받아쳤다.
그 애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당시 우리 형은 6학년.
돌을 던지지 않았는데도 골리앗이 물러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나이를 캐물으며 그 관계의 상하를 결정하려 애썼다
보통은 나보다 학년이 높으면 "형이네. 미안!" 하고 형을 따랐으니
놀이터에서조차 서열을 가리는 데 나이만큼 확실한 무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른의 세상도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었을 뿐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오면 어김없이 우리의 낡은 필살기가 시전 된다.
"너 몇 살이냐?"
길거리나 술집, 도로 위에서
"새파랗게 어린놈이"와 "그 나이 먹도록 뭐 했냐"의 공수 교대는 지겹도록 흔하다.
나는 오랫동안 나이라는 게 서열을 가르는 선긋기 정도로 여겨왔다.
그런데 30대 중반을 넘어 다시 보니
사람의 나이라는 건 저마다 등에 메고 있는 배낭 같았다.
유치원 시절의 배낭엔 배고픈 것, 졸린 것, 친구에게 아끼던 장난감을 빼앗긴 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담겨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받아쓰기 점수와 선생님에게 혼날까 봐 떨리는 마음이 가장 무거운 짐이 된다.
중, 고등학교 배낭엔 수능과 야자, 몰래 다닌 피시방,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갈리는 긴장이 담겼다.
20대의 배낭은 첫 사회생활, 꿈과 현실 사이의 흔들림이 들어찬다.
그리고 서른, 다른 무게가 실린다.
경제활동, 결혼 고민, 커리어, 성공에 대한 압박, 부모님의 건강.
특이한 건 대개 이 시기부터는 나 혼자만의 배낭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짐까지 조금씩 나눠 짊어지게 된다.
인간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그 나이에 맞는 무게를 배낭에 채워 넣으며
조금씩 단단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이가 많다는 건
더 많은 계절을 온몸으로 견뎌냈고
더 많은 실패를 맛봤고
더 많은 이별과 걱정을 겪었으며
수많은 상처에도 기어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삶을 꾸준히 이어온 사람이라는 뜻.
나이는 그 사람이 살아낸 수많은 밤과 계절의 총합이자 겪어낸 희로애락이었다.
그래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면
‘예의'라는 의무감보단 얼굴에 남은 시간의 흔적을 찾게 된다.
오래 웃은 자리, 찌푸린 자리에 생긴 주름,
한 번쯤 너무 무거워 엎드려야만 했던 마음이 지나간 흔적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말투가 조심스러워진다.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할아버지를 봐도
"저 나이 처먹도록 뭐 했냐" 하는 날 선 말 대신
"저 할아버지도 참 지랄 맞은 계절을 거쳐 여기까지 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고단했던 날들을 생각하면
굳이 날을 세워 함부로 대하고 싶지가 않아 진다.
문제는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서
모두가 근사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걸어본 인생 선배라면
길가의 자갈과 유리조각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뒤따라오는 발걸음이 덜 다치도록 자갈 몇 개 정도는 길가로 치워주면 좋으련만.
되려 그 고통을 훈장처럼 휘두르는 이들도 만난다.
그 차이는 배낭 속에 무엇을 담아냈느냐에서 갈리는 듯하다.
어떤 이가 지나온 계절은 그의 배낭을 더 깊고 따듯한 온기로 채워냈으나
어떤 이의 배낭은 지나온 파도들이 소금기처럼 남아 짠맛이 가득할 테다.
나 형 있어!!!
어린 시절엔 나를 지켜줄 무서운 존재로
든든한 우리 형을 소환하곤 했지만,
물론 마흔에 가까워가는 지금도
여전히 배낭 무게를 못 이겨 비틀대다 우리 형을 소환하기도 하지만
자갈을 발로 차서 뒤따라오는 이의 앞길을 막는 꼰대가 아니라
힘들 때 나타나 밥 한 끼 사줄 수 있는,
누군가에게는 '빽'이 되어주는 어른이고 싶다.
"괜찮아 임마. 너 형 있어."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