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다.
"괜찮아질 거야"는 점심까지,
"너무 신경 쓰지 마"는 집에 오는 길까지,
"다 잘될 거야"는 잠들기 전 사라져 있다.
내가 아닌
'뭔가를 해줘야만 할 것 같은 자신의 압박감'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살다 보면 누군가의 무너진 마음 앞에 서는 날들이 생긴다.
그럴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정답'을 찾는 듯하다. 근데 이제... 나의 주관을 듬뿍 곁들인.
나의 실패담, 실력과 행운이 우연히 정렬된 성공담을 바탕으로
어깨뽕이 차오르는 자랑 혹은 조언을 머릿속으로 굴려가며,
'이 막막한 상황을 해결해 줄 만한 멋진 문장은 무엇일까?'를 고민한다.
고통의 한복판에 서있는 사람은 명쾌한 해답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쏟아낼 수 있는 '귀'일 테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 (내용을 읽으면 불안관리론 이란 제목이 더 적절해 보이는) 에는
불안을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과 사례가 소개된다.
그 실질적인 방법 중 하나로 '적어보기'가 권면된다.
무엇이 나를 괴롭게 하는지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막연해서 보이지 않던 문제가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변하고
그 과정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들다며 찾아온 이에게
"그럼 일단 펜부터 들고 네 문제를 한번 적어봐"하는 것은 일종의 축객령.
"다신 나한테 찾아오지 말아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냉정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로또뿐만 아니라 '위로' 역시 분석보단 동행이기 때문.
누군가의 무너진 마음 앞에서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그 고통을 해석하고 분석하려 드는 것이다.
유튜브 쇼츠로 한 저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잠시 듣게 됐는데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한순간에 잃고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무너져 있던 분이
당시 가장 듣기 싫었던 위로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런 '분석적 위로'의 역사는 꽤 길어 보인다.
고대 문학인 욥기에는 의로웠지만
재산과 자식, 건강까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욥'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 소식을 듣고 세 명의 친구가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다.
도착 직후 그들은 욥의 처참한 몰골 앞에 차마 입을 떼지 못했고
칠일 밤낮을 땅바닥에 같이 앉아 함께 울어주었다.
내 관점으로 욥기에서 인상 깊었던 위로의 순간은 바로 이 '침묵의 칠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분명 F였던 친구들은 칠 일이 지나자 T로 변하기 시작한다.
"네가 뭔가를 잘못했으니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냐"라는 논리적인 비판을 쏟아낸다.
그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더라면 어땠을까.
지금 당장 숨이 안 쉬어지는 사람에게
"폐가 튼튼해지려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위로가 될까.
그냥 옆에서 같이 크게 숨을 쉬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니 앞으론 이런 말들을 건네보는 건 어떨까.
"밥은 좀 먹었니?"
"밖에 날씨가 좋은데, 잠깐만 같이 걸을까?"
"일단 가만히 있어도 돼. 나 여기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해결책을 내놓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그냥 곁을 지키는 것.
내 존재가 상대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만드는 댐이 되어주는 것.
가장 힘든 시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를 찾아온 사람에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