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왜 맨날 괜찮다고만 할까?

by 뭇별



보이지 않는 과외


오후 3시, 식곤증을 카페인으로 눌러가며 한창 다시 업무에 몰두할 무렵.

까맣던 휴대폰 액정이 짧은 진동과 함께 밝게 불을 비춘다.

화면위로 뜬 이름은 '사랑하는 엄마'.


"아들, 바빠?"
"바빠도 안 바쁘고 안 괜찮아도 괜찮지~"
"메일을 하나 보내려는데... 폴더째로는 안 보내지네? 통째로 보내야 하는데."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보이지 않는 컴퓨터 과외를 시작한다.

"엄마, 일단 폴더 위에 마우스 커서를 대고 오른쪽 버튼을 눌러봐.

그럼 메뉴가 쭉 나오지? 거기서 '압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걸 눌러줘.

메일이나 카톡으로는 폴더를 압축 시켜야 첨부가 돼"


휴대폰 너머로 몇 번의 딸깍임 뒤 엄마의 들뜬 목소리가 들린다.

"오, 하나 배웠네. 고마워."


갑자기 뭐가 고맙냐는 나의 물음에 엄마는 덧붙였다.

"아니~ 고모가 서운하다고 그러더라고.

사촌 동생한테 물어봤더니, 엄마는 왜 그런 것도 모르냐고 짜증을 냈다나 봐."


이제 막 서른이 되었다는 사촌 동생.

나는 그 녀석이 나빠서가 아니라 아직은 '어려서' 그런 거라고,

조금만 더 나이 들면 다정해질 테니 고모한테 너무 서운해 말라고 전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문득 '철이 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부모는 흔히 자식이 빨리 철들기를 바라는 것 같다.

부모의 수고를 헤아릴 줄 알고, 먼저 다정한 안부를 건네는 속 깊은 어른이 되기를.


그러니 자식에게 '철이 든다'는 건

어린 날 엄마 가슴에 무수히 박아 넣은 대못들을

이제야 정성껏 하나씩 뽑아내는 일보단

그 못 자국 위로 다정함이라는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압축해 보내는 일로 보인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는 인생의 수많은 굴곡을 온몸으로 통과해 내며, 이전에는 가치를 두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찾아냈다는 증거일테니.

그 소중함을 위해 자신의 날 선 고집과 제멋대로인 감정들을 삶의 무게로 꾹꾹 눌러 담는 과정을 지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커다란 폴더를 메일에 담기 위해 작게 압축하듯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러니 엄마에게 짜증을 내는 사촌 동생의 철없음은 역설적이게도

아직 압축되어야 할 만큼 아픈 일을 겪지 않았다는 가장 평화로운 증거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기에 부릴 수 있는 '어른이'의 '어르광'인 셈이다.


내 아의 철없음이 서운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이 아이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부모의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나라는 존재가 아직 이 아이에겐 마음껏 응석부려도 좋을 만큼 든든하다는 표현이구나. 하고 말이다.


아이가 제 모양 그대로 커다랗게 굴 수 있는 건,

아직은 스스로를 깎고 압축할 필요가 없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이의 폴더가 조금 무겁고 다소 투박하더라도 너무 오랜 시간 압축되지는 않기를.

세상의 풍파에 눌려 작아지고 깎이기보단 차라리 조금 더 서툴러도 그냥 커다란 채로 곁에 머물러주기를.

그렇게 제 모양 그대로 사랑 받기를.


오늘 밤엔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한다.

압축하는 법을 다정하게 가르쳐 주는 아들이 아니라

가끔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엄마를 귀찮게 해보는

아직 그냥 커다~란 폴더 같은 아들로 남고 싶어서.


그간 엄마가 보낸 수많은 '괜찮다'는 말들이,

실은 얼마나 많은 것이 담긴 압축이었을까를 이제야 짐작해보는 어리석은 자식은

오늘도 엄마의 서툰 클릭 소리에 기대어 다정한 압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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