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중에 넌 밥이 넘어가니? 그게 맛있어?"
드라마 속에서 자주 들리는 단골 대사.
다들 심각한데 혼자 태평하게 밥을 먹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비난.
'참 ~ 꼴불견이다.' 그 장면이 나오면 늘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슬픔과 공포, 대책없는 막막함 앞에서 모름지기 식욕 따위는 사라져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에
격하게 동감하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걱정이 생기면 밥이 잘 안 넘어가는 아이였다.
박찬호의 완봉승을 흉내 내고 싶던 그날.
마침 놀이터엔 지켜보던 친구들의 눈이 많았던 그날.
같이 공을 던지던 친구보다 더 세게 던져
'멋짐이 폭발'해야 한다는 소년의 일념은
정확하게 놀이터 옆에 있던 집 창문에 꽂혔다.
'챙그랑!!!'
유리창은 깨지고 내 마음은 무너진다.
엄마한테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집에 돌아와 밥은 못 먹고 밥그릇만 쳐다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진양철 회장님이 "밥알이 몇 개고?" 물었으면
난 개수를 대답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로도 신경 쓰이고 무서운 일 뒤엔 대개 밥알을 셌고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걱정 있으면 밥 못 먹는 사람'이라 규정해버렸다.
하지만 밥을 깨작거리는 누군가에게
"걱정 있냐?"하는게 한국인의 보편적인 인사말인 것을 보면
이 현상은 비단 나만의 패시브는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나에게 문제는 단순히 밥 한끼를 못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해결될 때까지
밥, 대화, 산책, 웃음이 모두 멈췄다.
"밥 먹으러 가자."는 주변인의 말은 왜인지 무책임했고,
"커피 한잔 할까?" 하는 동료의 제안은 사치였다.
“지금 웃는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문제 앞, 나는 늘 그렇게 굳어 있었다.
한동안은 그게 남들보다 집중력이 강한 증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대견한 집중력은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 뿐이었다.
제때 먹지 못한 배고픔으로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이제 와서 먹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남들이 한 번 더 웃을 때, 나의 미간은 한 번 더 주름진다.
표정과 자세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편도체는 날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어쨌든 그래도 하루는 마무리된다.
문제는 그대로인 채로, 나만 지쳐있는 채로.
여느 때처럼 미간에 주름을 긋고 문제를 파고들던 중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특별하다 믿었던 그 힘은
집중력이 아니라 잠식력이란 이름이 더 적절해 보였다.
잠식력, 문제 하나가 내 하루의 모든 영역을 통째로 잡아먹는 힘.
나는 마음의 모든 On/Off 스위치를
‘문제가 있는 방’ 하나에 몰아 연결해 둔 채 살아왔다.
그 방의 불이 꺼지면 내 하루 전체가 까매지는 구조.
내 손이 닿지 않는 영역과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까지도
'좋은 집중력'이란 말로 포장해 문제에게 공물로 바치고 있던 꼴.
그래서 마음의 구조를 바꿔보기로 했다.
원룸에서 방이 여러 칸 딸린 큰 집으로 이사하듯.
이사비도 인테리어비도 집값도 무료였다.
문제가 있는 방은 이제 어두워도 괜찮았다.
스위치가 고장 났으니 그대로 둔다.
대신 다른 방의 불을 하나씩 켠다.
1번 방 : 어떻게 하면 이 한입을 더 맛있게 먹을까만 생각하며 밥을 먹는 방
2번 방 : 머리가 복잡해지면 그대로 뛰쳐나가 제철의 매력을 찾아내는 방
3번 방 : 동료의 농담에 사무실이 떠나갈 듯 크게 웃는 방
4번 방 : 주말 저녁, 수많은 사람들의 활기를 빌려 같이 신나는 방
5번 방 : 책상에 앉아 아무 말이나 끄적이는 방.
희한한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켤 수 있는 방의 불을 모두 켜보니 집 전체가 환해진 듯한 날이 생겼다.
문제의 방 틈 사이로도 가끔은 빛이 스며들었다.
갑자기 문제가 해결되고, 스위치가 고쳐지며 인생이 반전되는 일.
그렇게 큰 사건이 바뀌어야 '기적'인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냥 밥을 맛있게 먹은 날.
새벽 4시, 불안에 눈이 떠지면 그냥 목욕탕에 갔던 날.
완전히 색이 변한 나무 앞에서 웃으며 셀카를 찍은 날처럼
내가 켜낸 작은방들의 불빛들이 어둠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던 시간이
기적에 가장 가까웠다.
이 변화 속, 한 가지 사실을 되짚어본다.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니?”라는 우문(愚問)에
태평하게 밥을 먹던 등장인물의 모습은 현답(現答)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