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5

Valencia Cafe

by 진메리

전시된 작품들만큼이나 유명한 V&A카페에 와있다. 점심시간은 훨씬 지났고 아침에 방에서 나온 뒤 처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쉬기 위해 앉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머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 카페는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A) 안에 자리한, 세계 최초의 미술관 내 카페라고 한다. 1868년부터 현재의 형태로 관람객에게 개방되어 왔고 공간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세라믹 타일, 벽화와 조각까지 모두 19세기 빅토리아시대의 흔적을 품고 있다. 어떤 문화가 예술을 위로 올려다보게 만든다면, 런던은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이런 공간에서 홍차 한 잔을 마시는 것조차 순수한 휴식이 아니라 다른 전시실로 건너와 감상을 이어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나저나 밤이 되기 전에 쓰고 싶은 것은
여기가 아니라 오전에 다녀온 노팅힐과 그 노팅힐이 나왔던 영화 노팅힐 이야기다. 사실 런던의 많고 많은 로드마켓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아서 갈까 말까 망설였던 곳인데(앞서 말했듯이 그날의 일정은 전날 밤에 정한다.) 오늘 역시 시차적응 실패로 일찍 일어난 바람에 오픈 시간이 이른 노팅힐의 포토벨로 로드 마켓에 가게 됐다. 게다가 토요일이라 평소의 시장에 더해 앤티크 마켓까지 열려, 동틀 무렵의 이른 시간부터 북적였다.

가보기 전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많아 관광객이 주된 손님일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시장을 걷다 보니 현지인의 비중도 적지 않았고 이곳은 야시장처럼 들뜬 분위기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리듬이 이어지는 곳에 가까웠다.

영화 노팅힐에서 윌리엄(휴 그랜트)은 안나(줄리아 로버츠)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난 뒤 혼자 이 시장을 걸어간다. 1분 30초가 넘는 롱테이크 장면동안 주인공의 허전한 마음과 대비되도록 활기차고 다채로운 시장의 모습을 시간의 흐름 속에 보여준다. 카메라는 윌리엄의 걸음을 따라가며 여름으로 시작해 낙엽이 날리는 가을, 눈이 쌓인 겨울, 화사한 봄까지 사계절을 차례로 보여준다. 시장 역시 계절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열상품이 달라지며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름에는 싱그러운 과일과 제철채소가 거리를 풍성하게 채운다. 가을에는 어두운 스카프와 우산이 비 내리는 풍경을 완성하고 겨울에는 빨간 포인세티아와 크리스마스트리로 시즌을 알린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꽃들과 생기 넘치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봄이 찾아온다. 초반에 등장한 임산부가 봄이 되자 아기를 안고 다시 나타나는 장면도 이 흐름에 작은 재미를 더한다. 시간은 이렇듯 일상을 따라 흘러가지만 주인공의 감정은 여전히 한자리에 멈춰 있는 듯하다.

포토벨로 로드 마켓에 와보니 왜 여길 배경으로 찍었는지 알 것 같았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소로 시장만큼 적절한 곳이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영화 속 장면이 겹쳐졌다. 모두가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 흐름과 어긋난 채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혹은 저마다 어딘가에 두고 온 마음을 하나쯤 안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윌리엄의 서점으로 나온 노팅힐북샵에서 귀여운 2층버스 마그넷을 샀다.


S에게 이 남자배우가 웡카의 움파룸파라고 알려주니 "원래는 지구인이었어?" 라며 굉장히 놀란다. 허구를 실제라 믿는 태도는 올해 역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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