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6

Valencia cafe

by 진메리

런던에서의 세 번째 밤이다. 두 번째였나?
경도를 지나오며 시간도 거슬러 왔더니 어쩐지 과거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역사가 길고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왠지 커다란 모자를 쓰고 레이스가 잔뜩 달린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채 한 손에는 양산을, 다른 한 손에는 홍차 잔을 들고 이 길을 이미 한 번쯤 걸어본 것만 같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S가 이보다 무심할 순 없는 톤으로 한마디 던졌다.


“뭐라는 거야…”


이모션 왕국의 로미 공주에 빙의한 채 믿어핑과 조아핑을 데리고 다니던 녀석에게 하이쿠 하나를 알려줄 생각이다.


홍시여, 잊지 말라.
너도 젊었을 땐
떫었다는 것을.
— 나쓰메 소세키


런던은 마니아층에게 높은 만족도를 주는 여행지인 것 같다. 역사와 미술, 공예, 디자인,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가 도시 곳곳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처음 홍차를 알게 됐다. 가장 평범하고 몸이 편할 것 같은 영화 감상반에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홍차 동아리 언니들의 교복을 보고 ILT에 들어가게 됐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는 단순히 해가 바뀐 때가 아니라 한 세기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광고 속 모델들은 메탈릭한 메이크업에 투명한 플라스틱 의상을 걸친 채
Y2K를 온몸으로 표현했고, 음악은 실험적인 전자음으로 가득했다. 그 무렵, 인생 처음으로 갖게 된 휴대전화의 이름은 cyber on을 줄인 싸이언이다.(첫 일기 참조) 교복 회사들 역시 은근히, 기술이 지배하는 미래의 이미지를 교복 디자인에 반영했다. 10대 연예인을 모델로 세우고 ‘예쁘게 보이는 교복’을 강조하며 학생복이라기보다는 패션 아이템으로 소비되도록 만들었다. 교복 치마는 처음부터 살짝 짧게 나온 데다 허리를 접어 입기 쉬운 구조였고 재킷 역시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도록 디자인됐다. 밀레니엄 시대에는 활동성보다 실루엣이 더 중요해 보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허리를 반 폭 늘렸나, 치마를 한 단 더 늘렸나 싶은 교복을 입은 언니들이 ILT를 홍보하러 1학년 교실마다 다녔다. 그 교복을 입은 언니들이라면, 밀레니엄이 아니라 벨에포크 할아버지가 와도 학생의 인권과 편의성을 해치는 일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ILT라는 동아리명에서도 동시대적 감각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소신이 느껴졌다. 동아리 신입 회원 선발 면접에서 L이 like의 L인지, love의 L인지 물었더니 언니들이 굉장히 좋아했다.

(like였다.) 치열한 면접 끝에(원래는 10명을 뽑을 예정이었지만 지원자는 6명뿐이었다.) 무사히 동아리의 일원이 되었다. ILT는 2학년 선배들이 1학년 때 만든 신생 동아리였고, 나는 2기이자 첫 후배였다. 우리는 김수녕 이래 우리 학교의 새로운 금빛 역사를 써 내려가자며, 매주 홍차 이론을 ㄱ공부했다.


그렇게 홍차를 처음 알게 되었고, 성인이 된 뒤에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홍차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취업을 하고 ‘사회인 1’의 역할을 맡고 나서는 취미를 발전시켜 보고 싶어 티마스터 자격증을 땄고, 욕심을 더 내 강사 과정까지 수료했다. 살면서 유일하게 애호가 기질을 발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홍차라고 말할 수 있다.


홍차를 오랫동안 품어온 사람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의 나라에 온다는 것은 보통 설레는 일이 아니다. 맛집에 큰 관심이 없어도 포트넘 앤 메이슨에서 스카치에그에 곁들인 홍차 한 잔쯤은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런던에는 티 문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전통 있는 브랜드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해롯 Harrods이다. 1834년 식료품 상점으로 시작해, 영국 최초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백화점이 되었다. 세계 각지의 질 좋은 제품만을 취급하던 해롯은 찻잎 역시 우수한 품질을 자랑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밀레니엄이 막을 올린 지 25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만든 물건도 내 방에서 주문해 받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유일하게 런던에서 직접 사 가고 싶은 것은 해롯의 홍차다. 나에게 평생 한 가지 차만 마셔야 한다고 할 때 내가 선택할 차도 해롯의 블렌드 49이다.


구릿빛 차통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전문 티마스터의 자부심 넘치는 설명을 들으며 향을 맡고 찻잎을 고르고 싶다. 말 그대로 해롯은 구매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광고카피에서 본 비욘드가 생각난다.


내일은, 여기 해롯에 갈 계획이다. 진정한 비욘드를 경험해 보는 것이다. 하하


왠지 자꾸 웃음이 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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