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8

Valencia Cafe

by 진메리

지금은 코벤트가든 근처에 있는 맥도널드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먼 외국 땅에서 보니, 마치 익숙한 고향의 음식점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 몇 끼를 밖에서 해결하고 나서야 알게 됐는데, 런던에서는 보이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는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 영수증은 폭력적이고 맛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세계 어딜 가도 비교적 표준적인 맛을 구사한다고 믿었던 우동조차 나에게 사색의 시간을 안겨줬다. 그에 비하면 이 맥도널드 지하의 한 구석 자리는 외할머니가 나를 위해 마련해 두셨던 시골집 아랫목처럼 미뢰의 긴장감과 카드값의 불안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보호받고 있는 기분마저 준다.


조금 전에 두 개의 햄버거와 닥터수스의 캐릭터 그린치가 그려진 핫초코를 받아 들고 아랫목에 다시 돌아왔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그저 따뜻하고 달콤한 안정이다. 지금은 오후 7시 10분이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쇼디치에서 멀지 않은 리든홀마켓에서 점심을 먹고 생일선물을 열어보는 심정으로 해럿백화점으로 향했다. 홍차에 관심 없을 J와 S를 위해 2층버스 안에서 해럿과 왕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헤이 가이즈

리슨,


왕실과 관련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 중 한 명인 다이애나 비는 1997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셜록홈스의 나라답게 이 사건에는 여러 음모론이 따라붙지만, 공식적으로는 운전자 과실과 파파라치의 추격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기록되어 있다. 사고 당시 그녀의 곁에는 해럿 백화점 소유주의 장남, 도디 알 파예드가 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사망했다.


해럿 측은 백화점에 Innocent Victims(무고한 희생자들)라는 제목의 브론즈 조각상을 세웠는데 이는 비극에 대한 추모이면서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항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품은 이 조형물은 이후 소유주가 바뀌면서, 원래의 소유주였던 알 파예드 가문에 반환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깊이 몰입했던 탓인지, 나는 지금도 해럿을 떠올리면 감정이 과도해지곤 한다. 백화점치고는 말이다.





여기부터는 맥도널드가 아니라 방에 들어와 잘 준비를 마치고 쓰고 있다. S도 옆에서 자신의 일기를 쓰는 중이다. 마지못해 연필과 공책을 꺼냈던 다른 날과 달리, 오늘은 스스로 쓰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방법은 물건을 사는 일일 것이다. S는 해럿에서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하고 있던 미니어처 만들기 중, 자기 두 손을 쫙 펼친 것보다도 큰 장난감을 골랐다. 완성품은 ‘미니’ 일지 몰라도, 돈 쓴 이의 종이 가방만큼은 크게 채워줄 셈인가 보다. 기분까지 계산되는 세상에서, 이 불필요한 배려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지구야, 미안해.


이제 홍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할 차례인 것 같다. 자,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입구? 횡단보도?


리든홀 마켓을 떠날 때부터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어제도 저녁 무렵부터 가늘게 비가 내리긴 했지만, 오늘은 낮부터 제법 많은 양이 쏟아졌다. 그래서였을까. 멀리서 보이는 백화점 앞 횡단보도 위로, 축축한 머리칼을 한 채 같은 곳을 향해 통통 뛰어가는 물기 먹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주 출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여기 혹시 싸이 흠뻑쇼장인가요?’

라고 물어볼 뻔했다. 비를 피해 실내로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아니, 빽빽했다. 보이는 건 앞사람의 뒤통수와 내 신발등뿐이었다. Excuse us(어제 현지인이 쓴 표현을 배웠다.)를 천이백 번쯤 말하며 고작 3미터를 전진했다.

그 사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줄 기차를 만들었다. 3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몸이 기억하는 꿈동산유치원의 안전교육에 감탄하며, 선생님들의 노고에 잠시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가 어디인지, 몇 층인지도 모른 채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어느 층쯤에서야 앞이 조금 트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붙잡고 꼬리뼈부터 목뼈까지 쭉 편 채 턱을 들자, 환한 조명빛이 이마로 떨어졌다. 하루 종일 회색 하늘에 익숙해진 홍채가 충격을 받았는지, 시야가 부옇게 번져나갔다. 고개를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이 알록달록한 빛 번짐은 뭐지.


튀김을 집었던 손가락으로 문지른 카메라 렌즈처럼, 누군가 내 안구에 기름칠을 해놓은 것 같았다. 일부러 하품을 해 눈물로 씻어내고,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서서히 또렷해졌다.


저 몽글몽글한 것들은 테디베어구나.

저 거무죽죽한 상자들은 우주선이구나.

S는 이미 분홍색 코너 어딘가를 향해 부스터 기능을 켠 상태였다.

길어야 3분이면 될 거리를, 40분 넘게 쓰고 올라온 자리에서 아이를 설득할 기력도, 방법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우리나라에서도 파는지 검색부터 해볼 텐데, 휴대폰을 꺼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빽빽한 콩나물시루 속에서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카드를 긁었다.

이게 해럿에서의 첫 쇼핑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쇼핑을 위해 식품 홀로 내려가자. 장난감 층은 그나마 여유가 있어 에스컬레이터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집트풍으로 꾸며진 실내 장식을 지나, 식품 홀의 첫 관문이었던 초콜릿 홀로 입장—

…과 동시에 다시 시작된 싸이 흠뻑쇼.


천장은 낮지만 비교적 널찍한 홀을 초콜릿과 사람으로 가득 채운다면 이런 느낌일까. 3년간 연간 회원이었던 롯데월드에서도 이 정도 인파를 본 적은 없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연말 시즌이라 그런지, 예쁘게 포장된 디저트를 사려는 사람들로 홀은 가득했다.


세계적인 초콜릿 전문점인 고디바 앞에서는 꼭지를 떼지 않은 탐스러운 딸기를 플라스틱 컵에 가득 담고, 그 위에 녹인 초콜릿을 부어 먹는 간식을 팔고 있었다. 그 앞에 늘어선 줄은 통로를 따라 기역자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저 배수의 진을 뚫고 지나가야 홍차 코너로 갈 수 있는 상황.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쉽지 않았다.


딸기 초코 학익진을 돌파하느냐,

가정의 평화를 위해 후퇴하느냐.


기로에 서서 뒤를 돌아 한 줄 기차 대원들을 살폈다. 가운데 낀 S 대원은 장난감 쇼핑으로 에너지 샷을 맞은 듯 아직 팔팔했다. 반면 J 대원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고, 비인지 땀인지 모를 투명한 액체가 턱끝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혹시… 눈물?

그 순간, 잊고 있던 이 여행의 타이틀이 스쳐 지나갔다.


‘오재일 은퇴여행’


그러자 런던에서 이것만큼은 꼭 사 가리라 마음먹었던 블렌드 49조차 짐처럼 느껴졌다.


왜 꼭 사야 하지?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해럿에서 해럿 홍차를 사는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할까.


백화점이 한가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태우며 홍차를 사는 건 욕심이었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홍차, 해럿 블렌드 49의 향과 풍미가 입가에 맴돈다. 위시리스트를 남겨둔 덕에 여생의 또 다른 런던 여행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런던에서 런던 여행을 꿈꾸다니—점심을 먹으며 저녁 메뉴를 떠올리는 일 같지만, 왠지 설레는 일인 건 분명하다. 나중을 위해 오늘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아쉬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숨이 조금 찰 때마다 이 말을 꺼내야겠다.

"다음도 있어!"


그러면 얼마쯤은 모자라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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