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9

Valencia Cafe

by 진메리

영국 박물관 안에 있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시켜두고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서양인들이 에스프레소 한 잔을 길어야 1분 안에 다 마시고 나가는 걸 여러 번 봤다. 자리를 잡고 앉을 생각은 애초에 없어 보였다. 작은 컵을 받자마자 한 모금, 쓰레기통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또 한 모금, 그 앞에서 마지막 방울까지 털어 넣고는 컵을 버리고 그대로 카페를 나간다. 아마 이탈리아 출신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 확인한 바는 없다. 이들의 음용 방식에 호기심이 생겨 나도 에스프레소를 더블로 주문해 본 것이다.


대학생 때 친구 한이가 마시던 에스프레소에 입을 대어 본 적이 있다. 마셨다는 표현보다는 아랫입술을 살짝 적셨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한약보다도 쓴맛에 지렁이 눈썹을 만들어 오만상을 지었더니, 한이는 평소에도 자주 보여주던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재밌어했다.


20년이 지난 오늘, 긴장한 채로 아주 작은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내 기억 속의 에스프레소보다 풍미는 깊고 쓴맛은 날카롭지 않다. 오히려 고소함과 온기만 남기고, 잠깐 머물다 사라진 쓴맛의 빈자리가 아쉽기까지 하다.


짧지 않은 세월이 쓴맛에 무뎌지게 한 걸까. 아니면 이제야 쓴맛 뒤에 남는 것들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옆에서 J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여기 원두 맛있다는 말을 세 번째 반복하고 있다. 꼭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다.

"됐고, 여기 원두가 그냥 맛있어서 그런 거야."


지금 한이는 제주도의 한 골목에서 오래된 집을 개조해 내추럴 와인 전문점을 하고 있다. 제주도에 관광객이 늘었다는 뉴스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고, 그 반대의 소식에는 내 마음에도 먹구름이 낀다. 그래도 항상 똑같은 것은, 그 골목을 사랑하는 한이와 친구들이 매일 밤 시와 음악을 들으며 오늘도 그들의 결을 지켜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집에 가면 한이에게 에스프레소에 입문했다는 소식을 전해야겠다. 아직 반도 못 마셨지만!



거대한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영국 박물관의 입구 앞에서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이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인류의 보물 때문일 수도 있고, 워낙 압도적인 규모이다 보니 관람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책에서만 보아오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물 앞에 섰을 때는 이유를 가늠할 새도 없이 오소소 소름이 돋고,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고 말았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사이에 자리했던 메소포타미아는 점토로 만든 세계였다. 잦은 홍수와 강의 범람 앞에서 점토로 지은 집과 신전, 성벽은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니 오늘을 살고,
주어진 몫을 받아들여라.


⁠ 도시가 하루아침에 흙으로 돌아가는 걸 겪은 사람들이 천천히 체득한 삶은 결론은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오히려 더 또렷해진 것 같다. 읽을 수 없는 쐐기문자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말씀으로 읽혔다. 착하게 살며 욕심내지 말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거라, 그거면 된다.


야구선수의 아내로 살면서 매 경기가 홍수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는 한없이 취약한 점토사람인데, 매일같이 비가 왔다. 마음은 늘 불안했고 미래는 자주 무서웠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바르르 떨며 흔들렸지만, 그의 속이 더할 것을 알기에 내색조차 조심스러웠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늘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아침은 항상 홍차로 시작했고, 오전에는 운동을 하고 왔다. 오후에는 책 읽는 시간을 꼭 떼어 두었고,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그리고 J에게는 매일 같은 말을 했다. 야구의 신은 결국 당신 편이니까 쫄지 말라고.


그렇다고 해서 오후 여섯 시의 긴장까지 피할 수는 없었지만(평일 야구 경기는 대부분 여섯 시 반에 시작한다.) 이 시간들은 흩어져 있던 나의 진주알들을 한데 모아 더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자라난 나만의 보석은 어느새 명치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보석을 껴안듯 숨을 크게 내뱉으면 출렁이던 마음도 전보다 훨씬 쉽게 잠잠해진다.


J가 욕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상을 탔을 때도, 은퇴를 결심했을 때도 나는 보석을 껴안았다. S와 다퉜다는 친구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도 어김없이 보석을 안았다. 내가 보석을 찾기도 전에 스스로 두둥실 떠올라 나를 보호해 주는 것 같았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며 그저 일상을 살았을 뿐인데, 잘 키운 보석 하나를 갖게 되었다.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는 것도 알기에 가장 오래된 메멘토 모리이자 카르페 디엠이라 불리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점토판 앞에서 보석을 잘 지켜내고 싶다고 고백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이다.
생명은 신들의 몫이다.

영원한 생명을 찾지 말고
네가 가진 하루를 기뻐하라.

야구가 알려준 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과, 욕심내지 말고 오늘 하루나 잘 살라는 것이다. 어쩐지 두 가지가 좀 부딪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내가 몇 년 동안 담아두고 있는 말이 하나 있다. 정말 화가 날 때 질러야지 하면서 비장의 무기로 간직하고 있는 말. 화는 안 났지만 오늘은 특별히 영국 박물관이니 한번 해보려고 한다.


어이, J!

5번 타자 5재일 5타수 5삼진

이게 프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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