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encia Cafe
일정은 바뀌어도 하루의 마무리는 어째 항상 코벤트가든이다. 항상이라 해봤자 고작 나흘째지만.
올림픽공원 근처에 '코벤트가든'이라는 파스타집이 있었다.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맛집이자 송파 주부님들의 브런치 아지트로 유명했다. 그때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막 한 병아리 신입사원이었는데, 사수에게 배운 것 중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나는 건 코벤트가든의 빼쉐뿐이다.
“술 먹은 다음 날은 무조건 빼쉐야. 굴국밥이 아니다, 이거야. 이런 걸 적으라고.”
“넌 집이 그쪽이니까 코벤트가든 빼쉐로 해. 적었어? 한 번 더 말해줘? 코. 벤. 트. 가. 든.”
병아리에서 술 마시는 쌈닭으로 자라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입사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사수는 다른 회사로 이직했지만 그의 가르침만큼은 충실하게 따르며 코벤트가든의 빼쉐를 주 5회 먹은 적도 있다. 코벤트가든이 마지막 영업을 하던 날에는, 30년 전통의 방이동 감자탕집에서 소주와 맥주를 적절히 섞어 마시다가, 다음 날 내 속을 달래줄 얼큰한 토마토국물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애통함을 이기지 못해 소주와 맥주의 비율을 5:5로 맞추기까지 했다. 친구 말로는 내가 닭볶음탕 국물을 토마토국물이라고 하며 내일 먹어야 한다고 포장해 달라고 했단다...
MBTI검사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계획적이고 철저한 성향이라고 해석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지금 생각난 건데, 그 감자탕집에서 감자탕을 먹어 본 적은 없고 매번 닭볶음탕만 시켰다.
그 코벤트가든의 가호일까. 어디에서 검색을 하든 호텔로 가려면 코벤트가든 근처에서 환승하라고 나온다. 지하철이든 버스든 일단 내려서 안내된 정류장까지 조금 걸어야 했는데,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분위기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정식으로’ 일정에 넣고 영국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걸어서 코벤트가든으로 향했다.
“근사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빼쉐 먹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격을 확인한 뒤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안—혹은 못—들어갈 가능성도 아주 크게 열어두었지만 이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안쪽 광장에서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배경으로 거리의 예술가들이 각자 준비한 무대를 펼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마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두 명의 남자가 진행하는 코미디 쇼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남자는 긴 사다리의 꼭대기까지 올라 발을 걸고는 그 상태로 저벅저벅 걸었는데, 사다리가 그의 신체 일부인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다른 한 명은 커다란 빨간색 공 위에 올라 두 발로 계속 굴리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발목까지 오는 검은색 컨버스에 초록색 양말은 신은 모습이 왠지 스타일리시해 보였다.
쇼는 중간중간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냈고, 언제나 자기소개로 시작됐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러 왔다는 청년 미켈레, 베를린에서 대가족과 함께 여행 중이라는 벤 할아버지, 그리고 런던에 사는 아홉 살 소녀 썰피.
썰피는 사다리에 올라간 남자에게 곤봉을 던져주는 역할을 맡았다. 받기 좋은 높이로 던져야 했는데, 어린아이가 던지다 보니 중요한 부위로 날아가기도 하고 머리 쪽으로 향해 날아가다 가발이 벗겨지는 상황도 연출됐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때마다 두 남자는 플리즈를 길게 발음하며 썰피의 이름을 목청껏 불러댔다.
“썰피! 써얼피!!”
5분 동안 ‘썰피’라는 이름을 백 번도 넘게 들은 것 같다. 계속 듣다 보니 괜히 나도 한 번 불러보고 싶어, 옆에 있던 J에게 ‘써얼피’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데 흔하지 않고 예쁘다고 말했다. J도 “써얼피, 써얼피” 같은 발음으로 흉내를 내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들은 아홉 살 제니(S의 영어이름)가 그럴 리 없다는 말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난 저 이름 엄청 많이 봤는데? 지금 우리 반에도 있고, 유치원 때부터 꼭 한 명씩은 있었는데?? 엄마가 아는 재은이도 쏘피잖아!”
세상에. 풔킹잉글리쉬!!
이 썰피가, 그 쏘피란 말인가.
알고 들으니 그제야 써어~피, 써피로 들렸다. 놀람과 당황을 반씩 섞은 감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곧 런던의 회색 하늘만큼이나 짙은 굴욕감이 나와 J를 휘감았다.
* J는 외국인 선수들과 함께 생활한 시간이 자그마치 20년이라며, 읽고 쓰는 건 몰라도 리스닝만큼은 자신 있다고 평소 자주 말해왔다.
런던 남자가 미국 여자, 쏘피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에서 남자 주인공 찰리는 런던 사람이고, 여자 주인공 쏘피는 뉴욕에 산다. 파란 눈동자를 가진 찰리의 레이저 눈빛을 정통으로 맞고 저릿해진 가슴을 부여잡았던 그날, 나는 영어 이름을 쏘피로 정해버렸다.
그런데 불러도 못 알아들을 뻔했다니.
미안해요, 찰리.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어요. 썰피를 쏘피로 배웠어요….
쇼가 끝난 뒤, 핫초코와 뱅쇼를 파는 작은 부스에서 썰피를 다시 만났다. 소녀가 메고 있던 백팩 네임택에는 sophie라고 적힌 글자가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하필 그걸 S가 발견했다.
“혹시… 정말로 처음 듣는 이름, 썰피일 수도 있잖아.”
라고 말했던 내 입을 세게 치고 싶었다. 아이들은 왜 이런 것만 귀신같이 잘 찾아낼까.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그랬지만 내년 목표는 무조건 영어다. 영어 회화!!
1월 1일부터 EBS 귀가 트이는 영어 시작한다!!!
뚫고 만다, 귀!!!!!
* 1월 20일 현재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