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11

Valencia Cafe

by 진메리

*이 날은 카페를 자주 갔다. 그때그때 짤막하게 적어둔 글을 그대로 옮긴다.



오전 9시
러셀광장 한쪽에서 다람쥐를 봤다. 12월 중순이라 한겨울의 런던을 기대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히트텍은 기본이고 털모자, 목도리, 장갑, 손난로까지 단단히 챙겼는데 의외로 그리 춥지 않다. 1등급과 2등급처럼 계절을 딱 잘라내, '여기까지는 가을, 너부턴 겨울이야"라고 할 수 있다면 고작 겨울의 첫 날일 것이다. 아쉽게 가을에 들지 못한 오늘이 슬프려나.

아침에 호텔 로비를 나서자마자 밤새 내린 비에 촉촉해진 흙냄새가 났다. 공원에서는 바닥에 떨어진 젖은 플라타너스 잎들 때문인지 눅눅한 종이 냄새도 섞여 있었다. 난 이런 향을 맡으면 괜히 느려지고 싶더라.

다람쥐가 포르르 뛰어간 방향으로 따라갔다.
여기가 네가 묵는 곳이구나. 조식은 포함이니?

나무 합판으로 만든 작은 호텔, 객실은 솔방울과 바크 같은 자연 재료로 꾸며진 Bug Hotel이었다. 공원 근처 호텔에서 지원해 만든 것처럼 보였다.

어제 파리에서 벚꽃이 피었다는 이상기후 뉴스를 들었다. 바다에서는 운송 중이던 컨테이너가 화물선에서 떨어져 감자튀김 수천 봉지가 해안으로 떠밀려왔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가방에 넣고 다니다 돌덩이가 되어버린 백설기가 명치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늘 그 반대편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절망하고만 있지는 않으려 한다.

다람쥐가 마음 놓고 뛸 수 있는 곳을 위해 누군가는 애쓰고 있고, 겨울을 나야 하는 버그 호텔의 손님들을 위해 누군가는 먹이와 안전을 관리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사소하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다짐한다. 항상 이 편에 서 있겠다고.

보고 있으면 느려지고 싶어지고, 찜기에서 막 꺼내 아직 김이 폴폴 오르는 백설기가 떠오르는 쪽 말이다.



오전11시 30분
지금 눈앞에서 본 장면.

큰 서점 앞에 노숙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다. 홈리스가 아닐 수도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행색으로 서점 앞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중년 여성’이라고 쓰기엔 문장이 너무 길어 편의상 ‘그분’이라 적겠다.

그분은 붉은 체크무늬 담요를 두르고, 두 손바닥을 모아 무릎 위에 얹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마담”, 혹은 “써—” 하고 불렀다. 팔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 옆 바닥에는 신문과 연예 매거진을 몇 부씩 깔아 두었다. 서점 앞에서 팔기엔 꽤 도전적인 선택 같기도 하고 지능적인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서점 직원이 판촉 행사로 나와 있는 줄 알았으니까.

서점에서 네 명의 젊은이들이 나왔다. 그중 한 명이 그분께 알레르기가 있는지 물었다. (놀랐다.)
그분은 알레르기는 없지만 베지테리언이라고 답했다. (놀람을 넘어 감탄했다.)
젊은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던 음식점 봉지에서 포장 용기 하나를 꺼내 그분께 건넸다. 그분은 “땡큐” 하고 받으며 혹시 포크가 있으면 달라고 했다. 젊은이는 젓가락과 물티슈를 꺼내주며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했다.

알레르기를 먼저 묻는 배려에서 실천하는 존중이 무엇인지 배웠고, 자신의 식생활을 정확히 전하는 그분의 태도가 당당해서 좋았다.

산타클로스는 흰 수염을 기르고 빨간 옷을 입은 퉁실한 할아버지가 아닌가 보다. 영국에서는 혹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필독서로 삼으려나? 대형 마트나 제법 큰 상점에서는 크리스마스 모금을 하고, 개인들도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성금을 모으거나 물품을 기부받는다. 어제 리든홀 마켓에서 캐럴 메들리를 부르던 아이들은 “God bless us, every one!”
이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병원 이름이 적혀 있었으니 기부 모금이었을 것이다. 언니들의 노래에 감명을 받았는지 S는 동전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전부 넣었다. 줏대 있게 살아야 하지만 역시 크리스마스 분위기만큼은 휩쓸려야 제맛이다.

그나저나 젊은이들이 들고 있던 음식봉지 Bunsik이라고 적혀 있었다. 코벤트가든 근처에서 봤던 가게다. 베지테리언인 그분께 건넨 음식은 뭐였을까. 떡볶이였을까, 아니면 채소 김밥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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