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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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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May 17. 2024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말하지 않으면 몰라. 딸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아이는 하루에도 기쁨과 슬픔, 행복과 서운함을 오간다. 길 잃은 마음을 안으로 넣어두었다가 잠들기 전에 와르르 쏟아낸다. 밤마다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작은 몸 어디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터질 듯 부풀었던 아이의 주머니는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푸쉬쉬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쪼그라든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똑같이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너의 마음을 말해야 해.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기쁘면 기쁘다고 하고, 고마울 땐 고맙다고 말해봐. 표현해야 친구도 네 마음을 알지.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 이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구나.


딸의 이런 기질이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우 닮았다. 나는 아이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 이런 마음의 결과가 나타나는지 가늠할 수 있다. 물론 딸은 나와 다른 사람이지만 기본적인 성향이 닮았으니 저절로 알게 되는 마음들이 있다. 다양한 감정을 가진 아이가 세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감정을 드러낼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반대로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아이의 작은 숨구멍이 되어 주는 것. 아무리 졸리고 피곤해도 이야기를 듣는다. 잔뜩 말하고 나서야 이제 좀 개운해졌다며 몸을 빙글 돌리고 스르르 잠이 든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오늘도 한 뼘 더 자라느라 수고했다고.


나 역시 속상한 마음은 몰래 숨겨두었다가 혼자 터트린다. 남편에게 쏟아내거나 묵혀두었다가 글로 쓴다. 침대에 누워 어른인양 조언하는 이야기들은 실은 내게 하는 말이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그렇다고 내가 화를 내지 않는다거나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은 아니다. 나는 리액션이 크고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걱정도 사랑도 많다. 음식 앞에서 맛있다는 말을 스무 번은 외치고, 기분이 좋으면 두둠칫 거리며 몸을 흔든다. 물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긴 하지만. 다만 서운함, 속상함, 불편함 같은 감정들은 혹여 드러날까 꽁꽁 숨겨 감춰둔다. 학교에서 이어지는 아이의 고민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때론 말하고 싶다. 내게 왜 그렇게 무례했나요, 어째서 무시했나요.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하지 왜 없는 사람 취급했나요. 멀어진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는데 속시원히 알려줄 순 없었나요. 나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언제나 오케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든 게 다 괜찮은 건 아니잖아요. 입에만 맴돌던 수많은 문장들. 공기 중으로 산산이 흩어져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슬픔들. 마음 어딘가에 남아 이따금 나를 쿡쿡 찌르는 감정들. 나 자신이야 말로 제일 솔직하지 못하고 구석에 얼굴을 들이밀고 자꾸만 숨는 매일이었다. 바보 같았다. 더 이상 혼자 울거나 자책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달린 게 글쓰기였다. 쓸 수 있는 두 손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차마 꺼내지 못한 감정들은 단어와 문장과 테이블과 노트와 펜과 키보드와 노트북 화면 곳곳에 담아두었다. 그렇게라도 마음을 풀었기에 가라앉지 않고 살고 있다. 어떻게든 쓰는 사람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이유기도 하다. 지금을 살기 위해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단단한 문장을 모아 글을 쓰고,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언젠가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를 내기 위해서. 그때는 조금은 후련해진 마음으로 딸에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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