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시간
한 커플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글을 붙잡고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근처에 앉으면, 어쩐지 인사를 건네고 싶어진다. 나는 소음 속에서도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잘 듣는 편이다.(일부러 듣는다기 보다 예민한 귀가 자동으로 듣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대화를 듣다 보면 이름 모를 사람들의 다채로운 일상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이 든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풀고, 잠깐이지만 기분을 환기할 수 있다. 어떻게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서 버티는 지루한 시간을 견딜 힘을 얻는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자연스레 글감과 만날 때도 있으니 반가울 수밖에.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둔 신혼부부임에 틀림없었다. 근처에 있는 전자제품을 파는 커다란 매장에 막 다녀온 모양이다. 적절한 가격에 필요한 혼수를 알차게 구입해야 하니 TV, 건조기, 식기세척기와 같은 단어가 대화 속에 몇 번이나 등장한다. 애초에 싸움이 불가능해 보이는 나긋한 목소리와 화법을 가진 커플이다. 입가에는 설렘 가득한 웃음이 연이어 번지고, 서로의 손을 쓰다듬는 애틋함이 있다.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가 마음에 드네, 혼자 생각하며 나는 무기력하게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당한 선에서 결정했는지 혼수에 대한 대화는 끝이 나고, 남자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두 권의 책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힐끗 봤더니 전혀 다른 종류의 책이다. 하나는 심리책, 또 다른 하나는 주식책. 당연히 여자 쪽이 심리책을, 남자 쪽이 주식책을 읽을 거라 예상했는데 웬걸, 그들은 내 생각과 반대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집중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책 속에 완전히 몰입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냄과 동시에 완전히 함께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서로를 향해 아주 고운 미소를 보내곤 했는데, 내가 먹고 있던 초콜릿 케이크보다 몇 배는 더 달달한 풍경이었다.
여자가 책을 읽다가 실수로 테이블 모서리를 팔꿈치로 치자 커피잔이 덜컹 흔들린다. 남자는 빛의 속도로 잽싸게 잔을 잡아 채 자신 쪽으로 커피잔을 옮겨 둔다. 둘의 성격이 너무나 극명하게 보이는 순간이라 마스크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덜렁거리는 자와 세심하게 챙기는 자. 언젠가의 남편과 나를 떠오르게 하는 귀여운 커플이다. 나는 자꾸 물건을 잃어버리고 떨어뜨리고 넘어지고. 남편은 옆에서 팔을 잡아주고 물건을 챙겨주다 결국 자신의 가방에 나의 물건을 죄다 보관하던 언젠가의 추억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우리도 저렇게 마주 앉아 책을 읽던 파릇한 시절이 있었는데. 그런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밥 한 끼를 같이 먹기조차 쉽지 않다. 퇴근하자마자 정신없이 저녁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바쁜 남편과 아이에게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 고군분투하는 나. 무사히 하루를 마치기도 버거운 와중에 일상 나누기란 오히려 피곤한 일이 되어버렸다. 다 같이 과일 먹자!라는 명목 아래 식탁에 앉아봐도 그 시간은 길지 않다. 어쩐지 씁쓸하다. 우리가 마주 앉아 즐겁게 웃던 시간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아이의 등장과 동시에 우리 사이의 말랑함은 속절없이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지쳐가는 삶 속에 고단함과 무료함만이 고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오래된 사진과 영상을 보관해주는 클라우드 서비스는 ‘몇 년 전 오늘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종종 알림을 보내곤 한다. 사진을 열어보면 앳된 얼굴의 남편과 내가 등장한다. 그 시절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역시 카페였다. 나는 책을 읽거나 당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소한 취미-뜨개질이나 손으로 사부작 거릴 수 있는 것들-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남편은 맞은편에서 공부를 하거나 부지런히 이력서를 쓰곤 했다. 가진 돈은 없었지만 마음은 여유로웠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넘쳐흘렀다.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감싸 안으며 천천히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던 나날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눈부신 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한 기억이다. 사진을 하나씩 들여다보다 문득,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운 그 시간들은 멀리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남편과 나의 눈가 주름에, 자꾸만 생기는 흰 머리카락에, 둥그레지는 몸뚱이에, 무심히 툭 던지지만 실은 다정함이 가득한 한마디에, 내가 글을 쓰면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는 배려 사이사이에 촘촘히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 시간을 함께 지나 온 남편과 나는, 다른 형태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슬슬 지루해지고 여자는 좀 더 머무르고 싶은 모양이다. 눈짓으로 이제 그만 나갈까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좀 더 앉아 있자 얘기한다. 결혼을 앞둔 그들은 앞으로 어떤 시간을 통과할까. 두 사람이 나누는 나긋한 목소리처럼 조용하고도 평온한 삶을 살아갈까. 우리도 결혼 전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신혼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싸우고 화해하며 앞으로 나아갈 그들의 다음 챕터가 궁금해진다.
갑자기 비가 한 방울씩 내린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준비해야겠다. 오늘은 남편이 좋아하는 닭갈비를 해 볼까. 늘 아이 입맛에 맞추다 보니 먹을만한 반찬이 없어 빨리 일어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사과를 좋아하니 돌아가는 길에 한 봉지 사야지. 얼마 전에 회사에서 있었던 이슈는 어떻게 마무리되었나 묻지도 못했네. 두통이 있댔는데 잊지 말고 약국부터 들러야겠다. 지난번에 같이 보자던 영화가 있었는데 연휴에 치킨 시켜서 같이 볼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진다. 남편은 요즘은 어떤 것에 관심이 많은지, 가고 싶거나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마주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부지런히 쌓다 보면,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의 따뜻한 사랑을 서로에게 건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