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를 만드는 밤

by 현수진



황정은 작가의 신작 에세이 ‘일기’를 읽고 있다. 간결한 제목과 담담한 문장들이 좋아서 숨도 쉬지 않고 쭉 읽다가 몇 번이나 앞으로 되돌아왔다. 조용히 읊조리듯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멈추고 시공간이 고요해짐을 알아채게 된다.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책을 들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읽는 즐거움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떤 밤엔 소파에서, 다음 날 오후엔 아이의 피아노 의자 위에서, 오늘 아침엔 화장실에서, 방금 전에는 때마침 건조를 마친 빨래를 꺼내 정리하는 거실 한편에서 이야기가 주는 긴 여운을 느끼며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속수무책으로 폭증하는 날이 이어질수록 나의 무기력함 역시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와 아이는 최소한의 동선으로 집에 머물고 있다. 제한된 공간에서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별거 아닌 일에 짜증과 화가 번갈아 난다거나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듯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통에 매일이 죽을 맛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찾은 방법이 잠깐이라도 '읽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황정은의 문장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목구멍을 통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단어 하나하나가 어쩐지 나에게 말을 건네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다고, 잘 버티고 있다고.


황정은 작가는 자신에게 있어 독서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번에 이어지는 선형 경험이 아니라 수시로 멈추고 어떤 지점으로 돌아가고 다른 책으로 끝없이 건너가는 방사형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한번 책으로 들어간 책갈피는 한참 뒤에서야 그 책에서 나올 수 있거나 아예 붙들린다고. 나의 독서 역시 집안일과 아이 케어로 인해 수시로 점처럼 뚝뚝 끊어지기 때문에 이 문장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내게도 마음에 꼭 드는 책갈피가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야 '읽는 시간'을 잠시 멈춰야 할 때, 나와 책 사이를 단단히 이어 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작가는 책갈피를 모으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 우표를 열심히 모았었다. 만화책과 좋아하는 뮤지션의 CD, 성인이 되어서는 여행 후 마그넷이나 엽서를, 영화관이나 미술관을 다녀오고 난 뒤에는 팸플릿과 티켓을 모으는 것이 '무언가를 모으고 소중히 여기던 나'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가끔 고민 끝에 사던 물건이 다름 아닌 책갈피였는데, 언제나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손에 버릇처럼 쥐어져 있을 만큼 친밀한 존재였다. 하지만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책갈피를 발견하는 일은 어려웠다. 취향이 너무 까탈스럽다 해도 할 말은 없다. 서점, 팬시점, 가끔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나와 읽는 시간을 함께 할 존재로 선택할 만한 것은 몇 년에 한 번 겨우 찾을 정도였으니까.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신혼여행으로 떠난 프라하에서 산 우드 책갈피, 제주를 떠나기 전에 선물 받은 조개와 불가사리가 박힌 작은 책갈피, 후지시로 세이지 전시회에서 산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투명한 책갈피, 그리고 몇 개의 패브릭 책갈피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책갈피와 종종 함께 모아두는 것이 바로 책을 감싸고 있는 띠지들이다. 색이 예쁘거나, 질감이 마음에 들거나, 적혀있는 문구에 감동하여 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 띠지들을 책 사이마다 꽂아두고 마음이 내킬 때마다 책갈피 대용으로 꺼내어 쓴다. 작가 역시 띠지를 많이 모아 두었는데,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가위로 잘라 책갈피로 사용한다는 문장을 읽고 아,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싶었다. 이런 기발한 방법이 있었다니! 그렇지 않아도 요즘 책갈피를 하나 사고 싶으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던 참이었는데 절호의 기회였다.


서랍 안의 띠지를 와르르 쏟아 두고 마음에 드는 색 하나를 골랐다. 2021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감싸고 있던 연한 노랑빛의 귀여운 색이다. 들썩이는 마음을 잠재우기엔 역시 이거지 하며 가위로 사각, 사각, 사각 원하는 모양으로 잘랐다. 커다란 정사각형으로 자르고 보니 포스트잇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이래 봬도 재질과 두께가 엄연히 다르다며 나름의 합리화에 이르렀다. 책에 끼워 넣었더니 읽던 페이지를 찾기가 수월해졌고, 때마침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보라색이라 색상 대비가 아주 아름답다. 흐뭇한 얼굴로 새로운 책갈피를 꽂았다가 펼쳤다가 하며 책을 읽던 밤이었다. 한번 책갈피를 제작(?)하고 나니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소재가 되었다. 아이의 귀여운 그림과 글을 코팅하여 우리가 좋아하는 그림책 사이에 선물처럼 끼워두었다. 아이가 써준 사랑 가득한 편지도 내가 아끼는 소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포장하고 남겨둔 색이 고운 리본도 길게 잘라 그다음 읽을 에세이 맨 첫 장에 끼워두었다.




집에서만 머무는 이 지루한 시간들이 막막하고 불안하지만, 반대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작은 기쁨들이 있다. 스스로에게 오롯이 집중하면서 알게 되는 것들. 마음에 드는 책갈피를 찾아 이곳저곳을 헤맬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사이즈로, 원하는 질감과 색상으로 충분히 만들어 쓰면 된다는 것을. 이 기쁨은 오래도록 나의 마음에 찰랑거리며 담겨 있겠지. 재미난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뱃속이 간질간질거린다. 엄마, 이것도 책갈피로 쓰면 어때 하며 새로운 그림 하나를 건네고 간 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잠이 든다. 오늘은 또 무엇을 어떻게 잘라볼까? 웃음이 저절로 실실 새어 나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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