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이사를 준비합니다.

by 현수진



곧 이사를 앞두고 있다. 틈나는 대로 집안을 정리 중인데, 새삼 이 작은 집 곳곳에 잡동사니와 먼지를 잔뜩 쌓아두고 살았구나 싶다. 잊고 지내던 물건과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겨 넣었던 물건들 사이에서 수많은 기억이 부스스 피어올랐다 흩어진다. 이건 아직 버릴 수 없지 하며 기어코 다시 서랍 안에 넣어놓고야 마는 것이 나의 오래된 정리 습관이지만 이사만큼은 다르다. 이사를 할 때는 조금 더 냉정해져야 한다. 지금 버리지 않으면 또 몇 년을 묵혀둘지 알 수 없으므로. 아쉬운 마음 때문에 또다시 이삿짐 박스에 넣어 버린다면, 물건들은 새로운 집 한편에서 마치 살아있는 양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이사에도 살아남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하마터면 추억에 속을뻔했다. 지나간 물건에 마음 주지말자 하며 쓰레기통을 가까이 끌어당긴다.




정리를 하며 느끼는 것이 있다면 우리 집에 ‘마스크 박스'가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인용, 어린이용, KF 94, KF 80, KF-AD, 덴탈 마스크형, 황사 방역형, 새부리형. 이름도 종류도 다른 마스크들이 각양각색 존재감을 내뿜으며 쌓여 있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 착용은 일상이 되었으니 대량 주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이 되어버렸다. 유일하게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혹은 마스크를 쓰는 것뿐이다. 여분 마스크까지 단단히 챙기지 않고서는 집을 나서기가 불안할 지경이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 그 누구도 나를 보호해줄 수 없음을 지난 2년간의 시간을 통해 뼈저리게 느껴서일까. 마스크가 바닥나지 않도록 수시로 수량을 체크하거나, 얼굴형에 잘 맞고 숨쉬기 편한 마스크를 테스트하다 보니 어느새 마스크 박스들이 쌓여갔다. 어쩐지 슬픈 마음이 들면서도 이 정도면 당분간은 걱정 없겠다 안심하며 박스를 톡톡 쳐 본다. 그리고 그 옆에 자리 잡은 손때 묻은 오래된 상자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이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커다란 분홍색 상자. 안에는 고사리 손으로 꼬물거리며 접었던 학, 거북이, 토끼, 고양이, 강아지 등등의 수많은 종이 접기들, 자유분방한 낙서의 흔적, 사랑을 담아 엄마에게 쓴 편지들이 들어있다. 이 순간이야 말로 이사를 준비하며 가장 어려운 시간이다. 아이의 모든 것은 영원히 박제하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고 소중하므로 애당초 '버린다'는 행위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워 가장 예민하고 차가워져야만 한다. 앞으로 쭉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가 아닌가. 물론 딸과의 협상도 필수다. 마음대로 버렸다가는 아이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를 내고야 말 테니까. 둘이 마주 앉아 박스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며 이걸 버릴까 어쩔까를 고민하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난다. 길고도 지루한 방학을 슬기롭게 보내는 방법이네 혼자 생각했다.



미니멀 라이프라는 유행의 흐름에 나 역시 탑승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가끔은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책, 철 지난 옷, 서랍 곳곳에 넣어둔 잡동사니들에게 내 자리를 내어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으면서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리를 어떻게 하는지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사람처럼 시작부터 늘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단추, 돌멩이, 그림, 편지 같은 작고 작은 물건들에도 의미부여를 하는 성격을 가진 내가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빼닮은 아이가 나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며 자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집안 곳곳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추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뒤집어쓰고 있는 물건들이 쌓여만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이어진 몇 번의 이사는 이런 성격을 용납하지 않았다. 반강제적으로 오래도록 버리지 못한 물건과 책들을 두 눈을 질끈 감아 분리수거장으로 내놓는 일을 두어 번 시도하고 나니 조금씩 덤덤해졌다. 슬프거나 속상하기는커녕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 물건이 우리 집에 있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잊혀 가는 속도에 스스로도 놀랐을 만큼.



수차례 협상 끝에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소중한 책들도 이제는 사촌 동생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용기를 낸 아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종이 접기와 그림과 낙서들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가장 마음에 두는 것들만 모아두었다. 이제는 우리 둘 다 비울 준비가 된 모양이다. 정리를 마치고 나니 사촌에게 보내줄 택배 박스가 여섯 개나 나왔다. 나 역시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은 중고 서점에 팔고, 몇 년 동안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은 옷은 모아서 기부했다. 물건을 정리하는 일에는 많은 품이 들었고, 택배비도 굉장했지만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추억은 추억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우리는 새로운 곳에서 또 수많은 추억을 쌓아나갈 테니까. 아이와 나는 깔끔해진 방과 서랍장을 들여다보며 씩 웃었다.




이사를 하고 나면 기다리던 봄이 천천히 다가올 것이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동네에서 조금 외로운 생활을 시작하겠지만, 살랑이는 커튼과 부드러운 러그와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의 책상과 의자 같은 것들을 어쩐지 설레는 마음으로 검색하게 된다. 버리는 것이 새로 사는 것과 연결되는 거구나, 씁쓸하면서도 동시에 기쁜 미소를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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