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 '공감'
얼마 전 병원 실무 실습이 끝이 났다. 과제가 많아 밤도 여러 번 샜고, 익숙하지 않은 약들과 약어들을 외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냥 하면 된다. 솔직히 어려운 일들은 아니었다. 문제는 마음. 마음이 어려웠다.
몇몇 과제들은 의무기록들을 살펴봐야 한다. 그 속에는 환자들이 먹은 약뿐 아니라 했던 말들이 담겨있다. 읽고 있노라면 마치 직접 대화라도 한 듯 마음에 남았다. “이제 괜찮아요. 퇴원해도 될 것 같아요.”라는 말에 안도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큰 병원이라 위중한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단순히 배가 너무 아파 응급실을 통해 내원했는데, 알고 보니 췌장암이었던 환자. 그리고 보호자에게만 우선적으로 알린 의료진. 이런 상황을 접하면 어느새 나는 이미 그 보호자의 입장이 되어있다. ‘뭐라고 하며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할까? 아니, 말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생각하며 쓰린 마음을 다스린다. 유방암에서 시작되어 이미 뼈까지 다 전이되어버린 30대 여성. 그녀는 결국 남편과 상의 후 치료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황임을 본인도 알았을 터이다. 그럼에도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선생님, 포기할게요."라고 말하는 순간 어땠을까? 남편의 마음은? 헤아릴 수조차 없음을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아려온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많게는 수십 명의 환자를 만난다. 안타까움, 슬픔, 두려움, 걱정, 안도 등의 복잡한 감정들이 공존하는 하루가 된다. 감정 소모가 많다 보니 쉽게 지쳐버린다.
실습 초반에는 ‘매일 이렇게 하다 보면 점점 덤덤해지고 익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8주라는 기간은 그럴 수 있기엔 짧은 시간이었고, 오히려 실습을 마칠 즈음엔 ‘평생 덤덤해지기는 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능 여부’를 떠나 ‘옳고 그름’의 문제가 떠올랐다. 즉, ‘아픈 환자들을 바라보며 덤덤해지는 게 과연 맞는 걸까?’ 하는 것이다.
tvN에서 방영했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인기리에 막을 내렸다. 인기의 비결 중 하나로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모습을 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의사들은 현실에선 없을 거라고. 아마도 병원에서 사무적으로. 심하게는 기계처럼 반응하는 의사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리라. 하지만, 많은 이들이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약사들도 마찬가지다. “하루 세 번 아침, 점심, 저녁 식후에 드세요.”라며 반사적으로 말하는 약사들을 많이 만나봤을 것이다. 물론, 바쁜 환자들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다. 하지만, 약사는 약을 주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마음이든 몸이든 다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올바른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환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약사가 되고 싶다.
하지만, 실습 기간 중 가졌던 지나친 감정 이입과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환자는 공감과 경청을 원하지, 연민과 동정을 바라진 않는다. 그리고 내 감정도 고갈되고 지쳐간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덤덤해져야 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공감’에 대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치고자 한다.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에게도 무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타인을 도울 자경이 없는 사람의 비겁한 행위도 아니다. 자기 보호를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누군가를 도울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중략)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