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현 Jun 12. 2017

식사 한 끼 같이 할 수 있을까요?

[한끼줍쇼]

 스무 살 때,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와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부산까지의 여정이었다. 배낭은 무거웠고, 그 해 여름은 터무늬 없이 더웠다. 무슨 패기였는지, 심지어 무전여행이었다. 코펠 하나와 숟가락 2개를 쥐고, 달그락달그락 매 끼니도 동냥해 먹어야 했다. 굶주린 배를 밥 대신 패기로 채울 때가 더 많긴 했지만.



식사 한 끼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요즘 [한끼줍쇼]라는 TV 프로그램이 유행이다. 대한민국의 대표 MC 두 명이 이 집 저 집 돌며 한 끼를 얻어먹는다. 평범한 가정의 식사에 숟가락만 얹어 함께 먹겠다는 건데, 어린 날의 나와 친구는 왠지 그게 미안했다. 그들의 한 끼를 통째로 빚지는 게 그렇게 못할 짓 같았다. 우리는 낯선 이방인에 심지어 유명인도 아니니까.

 그래서 코펠 하나에 이 집에선 밥을, 저 집에선 고추장을, 건너 집에선 나물을 얻어 비벼 먹을 심산이었다. 돌도 씹어 먹을 스무 살 청년들은 비빔밥을 이루는 세 가지가 다 채워지지 않아도 감사하게 먹을 줄 알았다. 식사보다는 그저 끼니면 족했다.


 어느 날 저녁, 상주쯤이었나?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인데요, 혹시 남는 밥 있으면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네? 밥이요?

네! 흰 밥 쪼끔만 주실 수 있을까요?

밥이 있긴 한데.. 혹시 서울에서 왔어요?

네.

학교도 서울에 있고요?

네.

음.. 잠깐 들어와요.



 나와 친구는 흠칫했다.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친구는 대전에 있는 학교를 다녀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서울이 아닌 경기도 여주에서 와서도 아니었다. 이름도 모를 작은 마을에서 흰 밥 한 줌을 얻는데도, 대학교가 서울에 있냐는 물음이 필요한가 싶어서였다. 도무지 어색해서.

 

 이방인에게 집 문을 열어주는 데도 학벌이 필요한가.


 조금은 이상하고 착잡한 물음은 어머님이 내어주신 돼지갈비 한 접시에 휘리릭 잊혔다. '세상은 아직 따뜻한 곳이야'하는 선의만 남았다. 오래간만에 본 고기반찬에 이성을 잃어서 어머님의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쯧쯧쯧. 어쩌다가...'하는 표정이 아니었을지.


 식사를 마칠 즈음이 돼서야 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박 한쪽을 내어주시며, 아들이 홍익대학교에 다닌다고. 서울에 있는 아들과 혹시 같은 학교는 아닐까 싶어 경계심이 풀어졌다고. 우리보다 한 살 많은데, 고향집에는 도통 안 내려와서 조금 서운했다고. 그런데 같은 또래의 우리를 만나서 꼭 아들 같았다고. 넋두리 넋두리.


아..


 그날 나는 누군가를 오해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에게만 밥을 주겠다'라고 누군가 생각한 줄로. 어쩌면 그런 오해나 곡해는 내게서 시작했을 텐데, 나는 누군가의 세상을 멋대로 왜곡했다.

 세상을 보는 눈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만큼이나 많다. 어떠한 것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이유도 그 정도로 많다. 젊은 날의 우리가 간과한 것은 그러한 다양성이었다.

 따뜻한 밥 한 끼에 묻힌 것이 고작 '서울 출신 아니면 서려워서 살겠나'싶은 어리석음이었다니, 아직도 부끄럽다.

 

 그래서 지금도 [한끼줍쇼]를 보면 그날의 식사가 생각난다. 이제는 쌍둥이 아빠가 되어 주말마다 돼지갈비를 뜯을지도 모를, 그 홍대 친구는 잘 지낼까? 하며. 아마 그때보다 고향 집에는 더 안 가겠지. 나처럼, 하며.



작가의 이전글 이탈리아인들은 아메리카노를 먹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