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현 Jun 08. 2017

이탈리아인들은 아메리카노를 먹지 않는다.

국민 IPA

 헥헥헥. 형 이제 그만 뛰죠.


 같이 사는 동생과 아닌 밤 중 홍두깨 식의 러닝을 했다. 오늘도 우유 두팩을 한 큐에 먹는 동생의 배를 보며, "좀 뛰어야 하지 않겠어?"하니 "그럴까요?"하며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섰다. 헌데 500m쯤 뛰자 얼굴이 새하얀 우윳빛이 되며 말했다. 아직 멀었냐고.

 어르고 달래 3km를 뛰긴 했지만 험난했다. 심지어 뛰고 나서는 갑자기 큰 병이 든 건 처럼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형,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요."

"옆구리가 너무 아파요!"


 산만한 덩치의 동생은 기침을 산 처럼 해대면서도 CU에 들어섰다. 그리곤 맡겨놓은 빚처럼 고민 없이 1000ml 우유를 한 팩 집었다. 고생한 자신에게 주는 상인 듯했다.

 딱히 고생은 안 했지만 내게도 상은 주어야지 않나 싶어(?) 맥주 한 병을 골랐다. 오늘 고른 맥주는 더부스 브루잉의 국민 IPA. 동생과 나는 마주 않아 우유와 맥주를 마셨다. 꼴깍꼴깍, 서로의 액체에는 전혀 관심 없이 각자의 행복을 들이켰다.


더부스 브루이의 국민 IPA


도수 - 7.0%

맛 - ★★★★☆

쓴 맛 - ★★★★★

과일 향 - ★★★★☆

ps - 국민 IPA지만, 전혀 국민적이진 않음.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였다. 아침 일찍 거리로 나섰는데 한 카페에 유독 줄이 길었다. 맛집인가 싶어 은근슬쩍 줄을 서서 보니 모두 에스프레소에 크로와상 한 조각을 먹고 있었다. 그들의 소박한 식사가 왠지 멋져 보였다.

 덥수룩이 수염 난 근육맨 아저씨가 엄지손가락 만한 찻잔을 쥐고 에스프레소를 음미하자, 내 입에선 "원 컵 오브 에스프레소 플리즈"가 외쳐졌다. 평생의 첫 에스프레소가 성급히 이루어졌다. 그것도 로마 한복판에서. 그리고 나의 첫 에스프레소는 그렇게 버려졌다. 로마 한복판에서.


에퉤퉤.


정말 더럽게 맛없었다. 아침마다 갈아주신 어머니의 인삼+마늘 주스보다도 훨씬. 어찌나 쓰고 향이 세던지, 코를 막고 먹어도 코를 열면 향이 입안을 채웠다. '이탈리안들은 모두 스님인가' 싶을 정도였다. 참을 인 자를 가슴속에 품지 않고서야 이 썩은 음료를... 그렇게 금쪽 같은 나의 칠천원이 공중으로 분해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메리카노를 먹으니 왠지 맹맹했다.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커피의 향이 코 밑에 돌지 않았다. 그저 커피 향이 첨가된 물 같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탈리아인들이 왜 아메리카노를 먹지 않는지. 한번 에스프레소를 맛보면, 그 어떤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을.


 IPA는 딱 에스프레소 같은 맥주다. 도수가 7.0%에 홉의 향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배였다. 쓰기는 또 얼마나 쓴지 먹으면 혀가 얼얼하다. 처음 IPA를 맛본 친구가 "에이씨, 이게 맥주야 독이야" 한걸 보면, 에스프레소와 비견해도 좋다.

 그런데 한번 IPA에 빠져들면 다른 맥주는 전연 먹을 수가 없다. 그 깊은 향과 쓴 맛이 다른 맥주들을 모조리 맹물로 만들기 때문이다. 지극히 라거타입 맥주를 선호했던 내가 단 두 병의 맥주로 돌아선 걸 보면, 그 깊이를 알만하다. 아직까진 조금 비싼 가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풍부한 홉이 선물하는 맥주의 깊이는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싸고 좋은 것은 없다지 않나. 비싸고 깊은 맥주는 오늘도 내게 선물이 된다. 우유를 홀짝홀짝 마시던 동생은 여전히 이 맥주에 무관심이다. 아무렴 상관없다. IPA는 그런 맥주다. 모두를 만족시키지 않아도, 누군가에겐 보물 같은 맛.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맛.

작가의 이전글 비 오는 오사카에서 뛰었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