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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Sep 12. 2017

"말대장, 고마워"

아주 따뜻한 사람과 함께라는 것.

 체육대회 한 번 이후로, 나의 별명은 '말'이 되었다. 입사 후 첫 체육대회였고, 하필이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종목이 편성되었다. 축구, 족구, 탁구. 모두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할 만큼 숙련된 종목들이었다. 그날의 나는 정말 '말'처럼 뛰었다. 뭐 저런 애가 다 있냐며 대장님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운이었다. 만약 그날의 종목이 농구, 당구처럼 세밀한 정확도를 요구했다면 나의 별명은 '말'이 아니라 '허당'이 되었을 공산이 더 크다. 어쨌거나 일은 벌어졌고 한 번의 각인은 지워질 줄 몰랐다. 그래서 각 지역의 천문대장님들에게 나의 별명은 꾸준히 '말'이었다. 절대로, 얼굴이 길어서는 아니다. (라고 생각할래요...)


 사람을 동물에 비유한 것이 불쾌할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은 쪽에 가까웠다. 신입사원의 패기를 인정받은 것 같았고, 그날의 열정을 초롬히 떠올리는 말 같았다.

 과중한 업무에 눌려 납작해진 채 아우성일 때도, "어이 말 팀장~ 힘내~" 한마디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받은 것처럼 달릴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말처럼 성장했다.


 얼마 전 미국에서 개기일식을 보고 돌아오며 와인을 한 병 샀다. 누구보다 나를 '말'이라 부르시는 P대장님을 위해서였다. 워낙 와인을 좋아하시는 것도 알았고, 그간 받은 응원이나 배려에 보답하고 싶어서랄까. 지점이 달라 자주 뵙진 못했지만, 4년 동안 쌓아진 감사함은 쉽게 꽉 찬 캐리어에 와인 한 병을 욱여넣게 만들었다. 그리곤 대장이 되어 처음 참석한 대장 회의가 끝날 무렵 P대장님의 뒤를 쫓았다.




"대장님! 여기, 와인입니다!"

"응? 웬 와인?"

"이번에 출장 갔다가 생각나서 사 왔습니다. 시애틀 와인이 유명하다고 해서..."

"응? 나한테!? 잘 해 준 것도 없는데..."

"아닙니다. 늘 감사했습니다!!"

"암튼 고마워! 잘 마실게!"


 P대장님은 화들짝 놀라며 선물을 받았다. 마치 응모한 적이 없는 이벤트에 당첨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운전석에 올라, 후진으로 천문대를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내내 그런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 2시간쯤 뒤에 띵똥, 핸드폰이 울렸다. P대장님의 메시지였다.


말대장, 고마워.
딱히 뭐 챙겨준 것도 없는데 쑥스럽고 고맙네. 빈말이 아니라 내가 말대장을 정말 좋아하지. 항상 열심히 즐겁게 사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아들에게도 종종 이야기해. 말 삼촌처럼 멋지게 살라고. 항상 응원하는 거 알지? 무엇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밥 잘 챙겨 먹고.

 그 짧은 메시지에서 나는 무언가 찡함을 느꼈다. 무언가를 베풀고, 그것에 감사한 사람에게 도리어 고마움을 전하는 품격이 멋졌다. 그것은 재력이나 능력에서 나오는 품격이 아니었다. 꽉 찬 인성에서 나오는 귀한 품격이었다. 



 별 것 아닌 한마디가 참 고마웠다. 내가 감사하여 드린 건데 그곳에서도 당신을 생각했다며, 고맙다고 정성스러운 연락이 돌아왔다. 감사함을 담은 작은 와인 한 병은 더 값진 한마디가 되어 돌아왔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늦은 러닝을 했다. 피곤함에 쌓여 뛰면서도 나는 무척 행복했다. 주변에 이토록 멋진 사람이 많다는 것이 주어진 복(福) 같았다. 별 빛은 언제나 환상적이었지만, 별 빛 아래 함께하는 사람들은 더욱 따뜻했다. 가슴 따뜻한 편지 메시지 한통은 모든 것에 감사함을 묻혔다.

 다른 것은 몰라도 꼭, 그 품격만큼은 배우고 싶다고 떠올리며 강변을 달렸다. 하늘에는 보름을 지난 달이 기운채 머물고 있었다. 몸을 한 번 기우뚱 하며 달을 쳐다보았다. 달은 고개를 숙여 바라보아도 변함없이 고고한 빛을 내고있었다. 누군가의 품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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