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정수리를 때리던 여름, 함께 일하는 K를 태우고 광교로 갔다. 우리보다 2살이나 어린 J양 보러 가기 위해서다. 낮이라면 1시간 반쯤 걸릴 곳을 50분 만에 주파하며 우리는 너스레를 쏟아냈다.
"세상 참 좋아졌어~ 오빠들 둘이 동생 한 명 보자고 이 새벽에 운전이라니"
"그러게, 아주 버릇없는 친구 구만~"
"그런데 J만 혼자 우리 쪽으로 오면 편할 것을 왜 우리가 가는 거야?"
"J는 차가 없으니까..."
우리 셋은 대학을 같이 다녔고, 한 때는 일도 함께했다. 선배에서 선임이 되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았지만 그래도 즐거운 날들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카페로 달렸고, 지겹도록 보면서도 주말을 핑계로 여행을 떠났다. 친구와 동료, 가족의 경계가 흐릿한 사이었달까.
그러던 중 J는 좋은 기회로 회사를 옮겼다. 새로운 역할에 막 발을 담근 참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무척 힘든 모양이다. 오빠, 로 시작한 카톡은 J가 쏟아내는 하소연으로 금세 홍수가 났다. 너무 힘들다며 쏟아내기에 소나기쯤에서 그칠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장마전선이었나 보다.
"그럴 땐 술이지, 기다려 오빠들이 간다."
그러니 사실 나와 K가 떠난 이유는 J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무엇이라도 털어놔야 좀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들어주기 위해서 떠났다고 할 수 있다. 고달픈 하루를 맥주로 치하하면서.
늦은 밤 만난 세 남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순 없다. 누구보다 완벽한 한국인들이기 때문이다. 왜, 이메일을 보낼 때도 '더운 여름 고생이 많으십니다' 따위의 서두가 긴 문화 아닌가. 일단 변두리 대화가 시작된다.
1. 누가 연애를 시작했다더라.
2. 관심 있던 한 여성이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더라,
3. 대학교가 많이 변했다더라,
4. 결혼 생활은 참 행복하더라...(?)
5. 이 맥주집은 뭐 이리 맛있냐,
6. 떡볶이 참 잘 시켰네... 등등
이렇게 변두리를 도는 대화가 세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본론을 이야기할 때쯤 되자 모두가 입을 모았다. "이제 집에 가자".
오늘도 J의 하소연은 듣지 못했다. 아아, 언제쯤 본론부터 얘기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위로를 하러 온 것인가. 또다시 서툰 위로만 남겨두고 J를 떠난다. 대리기사님을 모셔놓고 동이 트는 하늘을 아련하게 바라보며 생각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언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