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깃값이 문제가 아니다

by 조승현

'Big meat eater'. 대학 때 교양으로 영어 수업을 들으며 가장 유익했던 단어다. 직역하자면 큰 고기를 먹는 사람쯤 되지만 진짜 뜻은 '고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바로 나다. 고기에 환장한 사람.

친구들과 스위스에 갔을 때였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은 세기의 진리가 분명하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온 젊은이 여럿은 본분을 잊지 않고 고기를 먹어댔다. 우리는 목장의 나라에서 카트에 고기를 마구잡이로 담으면서도 섬세하게 계산했다.

"소고기 등심이 15프랑이면... 2만 원? 이 정도 무게면 한국에 4만 원은 줘야 먹을 수 있는데! 우와. 그럼 한 덩이 먹을 때마다 2만 원을 버는 거야? 역시 먹는 게 남는 거였어!"

고기를 먹을 때마다 돈을 번다니. 열 덩이를 먹으면 20만 원을 버는 셈이었다. 우리는 우수한 이과 졸업생이었고, 계산은 정확했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알바보다 시급이 좋았다. 대학생이었을 때는 고깃집에서 늘 통장 잔고를 떠올렸다. 그때와 비교하면 이건 식품 혁명이었다. 우리는 행복을 손에 들고 투자를 하듯 입속에 마구 털어 넣었다. 허기가 가실수록 지갑이 빵빵해지는 기적을 느끼며.

물론 안다. 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에겐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계산 법인지. 돈은 돈대로 내놓고 뭔 돈을 번다는 말인가 싶을 것이다. 그런데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가?


부모님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어릴 적부터 고기가 없으면 밥상머리에서 시무룩했다고 한다. 한창 세상의 기운을 제 것으로 착각하는 사춘기 땐 어머니께 대들기도 했다. "내가 토끼도 아니고, 어떻게 고기가 하나도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가시 돋은 생명체를 아들로 둔 어머니는 더 강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아마 그때였나 보다, 더 배고픈 Big meat eater의 길로 들어선 것이.

얼마 전 치과 진료를 받던 중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잘못하면 뽑아야겠는데요?". 평안하고 덤덤한 말투였다. 뽑는다니, 어금니를? 그럼 고기는 뭘로 씹나. 혀로?

나의 할아버지는 젊은(?) 할아버지였을 때부터 틀니를 끼고 계셨다. 이가 별로 없으셔서 진작에 틀니의 삶으로 진입하셨다. 그래서인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틀니를 끼고 먹기에 고기는 너무 질겼다. 덕분에 할아버지와 외식을 하면 고기를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고기보다 국수를 더 좋아하니까. 이가 별로 없으니까.

의사가 이를 뽑아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이렇게 하다 둘 빠지다 보면 틀니를 끼게 될 것이 분명했다. 틀니를 끼고 고기 대신 국수를 주문하는 삶이라니, 있을 수 없었다. 상상속에서 나는 이미 틀니를 주문한 젊은 할아버지였다. ‘임플란트’라는 천상의 기술을 떠올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흥분을 잦아들었다.


고기를 위해서 라도 건강 관리를 해야 했다. 180cm에 근접한 거대한 몸이 2cm짜리 이가 없어서 채식주의자로 전락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테니스에 미쳐있는 K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술이랑 담배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아”

“갑자기?”

“술이랑 담배를 끊으면, 테니스를 5년은 더치겠더라고”

“아...?”

“이 재밌는 걸 살면서 5년이나 더 할 수 있다면, 술, 담배는 끊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에 적절히 비웃었다. ‘퍽이나’ 라며, 그게 무슨 이유냐며 타박했다. 그런데 테니스를 고기로 치환하니 당연한 말이 되었다. 삶의 마지막 5년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고소한 육즙 없이 보내는 죽기 전 5년은 없느니만 못했다.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에게 사범은 말했다. “정말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체력을 길러라”.

나는 오늘도 고기를 위해 구강 체력을 기른다. 정말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이가 튼튼해야 한다. 테니스를 오래 치려면 폐와 간이 튼튼해야 하고. 'Big meat eater'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 고깃값보다 체력인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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