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나무가 죽었다. 인도산 고무나무. 탄탄한 줄기에 넙치 같은 잎이 십여 개 달린 화초다. 잎을 만져보니 쫀쫀하고 생기가 넘쳐서 쉽게 죽을 상이 아니었다. 가뭄에 콩 나듯 돌아오는 월급날에만 물을 주어도 평생 살 거라고 했다. 그런데도 죽었다. 싱크대에 올려놓은 바나나 껍질처럼 짙은 갈색으로 썩었다.
어느 날 보니 고무나무가 메말라 있었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살짝 집어보니 깡마른 가루가 되었다. 살릴 방법을 찾을까 하다가 손끝에 남은 바스락 거림에 그만두었다. 빛깔 좋은 소나무로 환생을 했어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었다.
고무나무와 처음 만난 장소는 천문대였다. 파란 하늘이 지붕처럼 덮인 가을, 함께 일하는 후배가 달려오며 말했다.
“이름 모를 단체에서 화분을 보냈어요”
“뭔 단체?”
“처음 들어봤어요. 구동회 라던데요?”
“내 친구 이름이야”
“네?”
“무슨 ‘회’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라고”
‘구동회’는 나의 가장 오랜 친구다. 나에겐 자연스러운 그 이름이 누군가에겐 ‘괴상한 단체’가 된다니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친구는 한마디 말도 없이 화분을 보냈다. 받는 사람이 선인장도 말려 죽일 만큼 화초에 무능한 인간인 줄도 모르는 채 말이다.
그래서 더 신이 났다. 한 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었다. 삭막하고 딱딱한 사무실에 초록의 생기 같은 걸 끼얹을 기회였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스투키’도 거부하던 내가 인도산 고무나무에 완전히 반해버린 것이다.
반해버기리는 무슨. 멋들어진 도자기 화분은 여섯 달도 채 견디지 못하고 폭삭 가라앉았다. 그해 겨울이 너무 혹독한 탓이었다. 이름부터 더운 ‘인도산 고무나무’가 배달된 곳은 하필이면 시베리아 기류의 목적지 같은 대한민국이었다. 추울 땐 모스크바보다 춥고, 잘못 켜놓은 라이트 한 번으로 자동차 배터리가 몽땅 나가버리는 혹한의 나라. 사무실의 새벽을 고스란히 흡입한 고무나무는 속절없이 스러졌다. 초록빛을 잃었다.
화분은 생명체를 담고 있어야 가치가 입증된다. 나무가 죽자 화분은 졸지에 모래를 담아놓은 양동이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버려지진 않았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거대하고 무거운 도자기를 내놓는 일엔 비범한 부지런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체 운동을 한 날엔 허벅지가 당겨서 화분을 들 수 없었다. 등 운동을 한 날엔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잡을 수 없었고, 가슴 운동을 한 날엔 마음이 아파서 내어놓을 수 없었다. 헬스는 일주일에 세 번쯤 하면서 온통 근육통 핑계다.
결국 화분에 새로운 나무를 심는 것으로 타협했다. 하지만 가여운 생명체를 또 죽일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생기 넘치는 플라스틱 조화를 심기로 했다. 전에 있던 나무와 비슷한 모양으로. 덕분에 화분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나 역시 근육통으로부터 안전했다. 결과적으로 초록의 생명체(인 척하는 인조 고무나무)는 여전히 사무실에 있다.
“조화 하나 더 샀어요?”
“웬 조화?”
“화분 좀 보세요”
그러던 봄, 화분에 또 하나의 초록색이 등장했다. 조화 옆에 깻잎 같은 잎이 두장이나 나타났다. 지난해 죽었던 고무나무였다. 죽은 줄 알았던 녀석이 뿌리에서 새 잎을 꺼낸 것이다. 세상에, 고무나무가 살아있었다니. 고무나무는 한 끗쯤 차이나는 생기를 머금고 조화 곁에 잎을 널어놨다. 자신을 대신한 인조 고무나무와 동거 동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태양은 생이 끝나면 백생왜성으로 죽는다. 어둡고 차가운 천체가 되어 우주에서의 존재감을 잃는다. 별들은 그렇게 빛을 잃고 죽는다. 그러나 백색 왜성 옆에 다른 별이 나타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웃 별의 도움을 받아 얼마 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 순간을 초신성 폭발이라고 부른다. 초신성은 수천 억 개의 별을 합친 만큼이나 밝아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죽은 줄 알고 화분을 내다 버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멀쩡한 고무나무 살해범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화분도 키울 줄 모르고 삶도 잘 모르지만, 죽은 듯 살아낸 고무나무의 말은 이해가 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간신히 숨만 쉴 줄 아는 신생아가 경이롭듯, 생명은 존재 자체가 감동이기도 하다. 끝날 때 까진 끝난 게 아니다. 그러니 혹독한 상황 속에 있대도 살아야 한다. 기어코 잎을 낸 고무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