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를 대하듯 피했다

by 조승현

비가 물소떼처럼 들이치는 오후였다. 나는 차를 몰고 부동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을 구해야 했다. 새로운 집에 대한 기대와 갈망에 비마저 시원하게 느껴졌다. 다가올 대출은 미소 옆에 얕은 쓴맛을 남겼지만, 존경하는 형님은 말했다. "세상에 대출 없는 사람이 어딨어". 그 말에 의하면 나는 이제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자라는 것을 내는 '어른'의 길목에 서있었다.

비가 내려서인지 차들이 종종걸음이었다. 평소보다 침착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느려지더니 이내 멈춰 섰다. 한 줄로 주르륵. 신호등도 아닌 곳에 맛집을 찾은 손님처럼 차들이 멈췄다. 이런 곳에 차들이 선다면 이유는 분명하다. 사고가 났거나 혹은 차가 퍼졌거나.

'아이고 어떡하나, 비 오는 날 차가 퍼지다니. 고생 꽤 하겠어'. 나도 서있는 주제에, 정차 행렬의 차들이 안쓰러웠다. 그것도 잠시, 저 앞 차들이 홍해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엠뷸런스 때문은 아니었다. 엠뷸런스가 역주행으로 차들을 갈라놓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차들은 마치 위협을 받은 것처럼 서둘러 악셀을 밟아 피했다. 아주 순식간에. 이 정도 속도라면 세상에 어떤 엠뷸런스도 골든 타임 걱정은 접을 수 있었다.

내 앞의 차가 갈라지고 나서야 홍해의 기적을 일으킨 예언자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이었다. 혈열 단신으로 빗속을 걷고 있는 남자. 흰 수염이 턱을 메우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마주오는 차를 향해 걷고 있는 중년.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빗속을 헤치고 있었다.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그의 발이었다. 와이퍼가 바삐 비를 걷어냈고, 시야는 물결로 주름졌지만 똑똑히 보였다. 맨발이었다. 시선을 얼굴로 옮겼다. 세상에서 가장 허탈한 조각이 그의 얼굴에 걸려있었다.


단 1초의 만남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핸들을 돌렸다. 부딪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 눈길은 계속 그를 좇았다. 찰나의 마주침은 나를 온전히 그에게 던져 놓았다. 그는 왜 비 오는 거리를 걸었을까. 그는 어째서 맨발로 세상의 공허함을 짊어졌을까. 사업에 실패했을까. 자식을 잃은 걸까. 오래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일까. 그저 술에 취한 것은 아닐까. 짧은 만남이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쨌든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생을 마감하기 위해 도로를 걷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며 부동산으로 향하던 나는 맥이 빠져버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허탈한 걸음걸이가 나의 등짝을 후려치고 있었다. 나는 죄가 없다. 잘못하지 않았다. 그저 코딱지 만한 집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 살며 모은 몇 푼을 전부 쏟아붓고, 그 돈으로도 부족해서 대출을 받아야 하는,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는 청년일 뿐이다. 그런 내게 모든 것을 포기한 남자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 부질없어."


부질없다니. 이제 난 시작인데.


억울하지만 세상은 단 1초의 만남에도 삶을 부정당한다. 한 순간의 표정이 세상을 얻게 하기도 하고, 한 번의 대화가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변화는 마치 데워지는 냄비 같다. 약불로 천천히 데워질 수도 있고, 강불로 급히 데울 수도 있다. 시간과 상관없이 얼마나 많은 열이 전달되었느냐가 관건이다. 어쨌거나 물은 똑같이 100도에서 끓는다.


나는 탕이어야 했다. 더 많은 열을 부어야 끓는 잡탕이 되어야 했다. 조금 텁텁하더라도 다양한 것을 가진 사람이 되면 물처럼 쉽게 데워지지는 않았을 테다. 물에 섞인 다양한 재료들이 온도를 나눠 가질 테니까. 그러면 아무리 센 불도 금세 데우진 못할 테니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 더 단단하게 품을 수 있으니까.

중년의 남자를 생각한다. 다시 그를 빗속에서 만나게 된대도 나는 핸들을 돌릴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 더 오래 쳐다볼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를 대하듯 피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그를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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