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비상금은 책꽂이에 꽂혀있다

일요일도 그곳에 있다

by 조승현

내가 살았던 동네엔 방 한 칸 만한 책방이 있었다. 만화책은 200원, 소설책은 300원에 빌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8살 된 나를 데리고 자주 책방을 들렀다. 문을 열면 코 밑에 낡은 책 냄새가 났다. 소설책이 몇 권 어머니 손에 들리면 나도 한 두 권을 따라 집었다.
지루함에 깔려 등으로 방을 훑고 다니다 보면 빌려온 책들이 꼭 옆구리에 치었다. 일요일 낮은 늘 고요했고 햇살이 좋았다. 그 빛 아래서 어머니는 배를 깔고 누워서 책을 보았다. 사각.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맞춰 시간도 살며시 걸었다.
책이 좋아진 것은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땀이 흥건했던 토요일과 마읍이 급한 월요일의 가운데서 나도 배를 깔고 누웠을 때. 이야기를 읽기보단 글자를 읽었을 때. 그렇게 한 자 한 자 눈으로 시간을 가두었다. 어머니와 나의 일요일은 잔잔하게 흘렀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은 하나같이 소박했다. 시간이 나면 뒷 산을 마실 삼아 올랐다. 주말엔 성당에서 목청껏 성가를 불렀다. 돈이 드는 취미는 하나도 없었다. 300원을 내고 빌리는 책이 어머니의 유일한 소비적 취미였다.
그런 어머니에게도 비상금이 있었다. 천으로 된 가방을 몇 년씩 쓰던 엄마에게도, 옷장엔 늘 보던 옷들만 가득하던 엄마에게도 비상금이 있었다. 그 돈을 쥐고 어머니는 말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전집이 있다던데, 읽어볼래?"
"무슨 책인데요?"
"과학 전집이야. 우주 얘기도 많이 나와있데."
"진짜요? 사주세요"
"아빠한텐 비밀이야"


비상금이 쓰이는 곳은 책이었다. 내 방 한쪽 벽은 전부 책장이었고, 한 계단 한 계단 모두 책으로 채워졌다. 1층엔 아빠 몰래 산 과학전집, 2층엔 숙제할 때 좋은 백과사전, 3층엔 헐거워질 때까지 읽던 세계 명작과 내 꿈을 응원한 천문학 이야기까지. 아버지가 책을 사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한 설득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비상금은 차곡차곡 책꽂이에 꽂혔다.

시간은 폭포 같아서 세차게 떨어져 가만히 웅덩이 모였다. 모질게 시간을 맞고 나니 나도 비상금을 만들어야 할 나이에 고였다. 어디다 비상금을 써야 할까. 옷을 살까. 고생한 나에게 딱새우를 선물할까. 꽃을 한 번 사볼까.
그러다 문득 책이 스쳤다. 어머니가 비상금으로 사준 책. 그날의 어머니는 삼십 대였다. 친구들과의 맛집 투어가 여전히 즐겁고, 아름답게 꾸미기에 더없이 눈부신 나이였다. 어쩌다 옷 대신 아들의 책을 선택했을까. 몰래 감춰둔 돈으로 한다는 일이 어째서 고작 초등학생에게 책을 사주는 일이었을까.

“엄마는 승현이가 책 읽는 게 그렇게 좋더라”. 비슷한 나이에 서서도 나는 그 마음을 모른다. 비상금으로 옷 대신 책을 사주는 품을 알지 못한다. 그저 책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는, 별빛을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쓰는 어른이 되었다. 나도 아빠가 되면 그런 마음이 될까? 모르겠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엄마의 비상금은 여전히 고향집 책장에 꽂혀있다. 나의 일요일도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