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직업은 노코멘트입니다

by 조승현

직업을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 서울대생들은 어느 대학을 다니냐는 질문에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 다녀요"라고 종종 답한단다. 기대감이든 질투든 괜한 감정을 만들기 싫어서다. 나는 그런 이유는 아니다. 그냥 조금 지쳐서다.

대학생 때부터였다. 전공이 뭐냐는 질문에 "천문학과예요"라고 말하면 질문이 폭발했다. 우와. 천문학과래. 재밌어요? 별자리 다 알아요? 교수님들과 별도 보러 다녀요? 처음엔 환영받고 관심을 받는 같아서 즐거웠는데 그것도 며칠뿐이었다. 결국엔 이순신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니요. 물리와 수학이 교수님과 나누는 유일한 언어인데요. 하하.

천문대에서 일한 후로는 더 심해졌다. 천문대 강사라고 하면 뭘 가르치는지, 정말 밤에 일하는지, 깊은 산속에서 일하는지, 천문학과만 취업할 수 있는지, 국가직인지. 비슷한 질문이 쉬지도 않고 쏟아졌다. 예상 질문을 달달 외운 취업 준비생처럼 틱 하면 톡 하고 답을 내어놓는 대답 자판기가 바로 접니다.


언젠가 소개팅을 주야장천 하는 친구에게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물은 적이 있다. 친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게 너무 지쳐. 소개팅을 시작하고 한 시간 동안은 누구를 만나든 너무 똑같아. 자기소개를 하고, 관심사를 얘기하고. 정해진 대본처럼 수십 번을 말하다 보면 이사람이 만났던 사람인지, 새로운 사람인지도 헷갈린다니까?"

친구의 말에 무릎을 쳤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딱 그거라니까! 생소한 직업에 주는 호기심은 감사하지만, 꽃노래도 한두 번이란 말이 있다. 우주 이야기보다 천문대 강사의 하루를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될 줄이야. 직업 공개는 자기소개로 시작해서 면접으로 끝나는 일이었다. 조금은 피곤할 만하지 않나요?



물론 별을 본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순간도 있었다. 여행 삼아 외국의 천문대를 갔었을 때의 일이다. 유서 깊은 미국의 릭 천문대를 방문했다. 산 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천문대로 거대한 3M 망원까지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면 뭘 하나. 구불거리는 산길 탓에 속도를 조금 늦췄다니 관람 시간을 넘겨버렸다. 맙소사. 멀미에게 오지 말라고 위협하며 절벽길을 한 시간이나 올라왔는데 볼 수 없다니, 이를 어쩐담.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제가 사실, 한국의 천문대에서 일하는데요".

뜻밖의 동료를 만난 안내원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 마이 프렌드!" 그리곤 금빛 열쇠를 들고 직접 망원경실로 안내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드물지만 이런 순간도 있었다.


그렇다고 피곤하던 직업 공개가 한 방에 즐거운 일이 될리는 없다. 차라리 글을 쓴다고 말하는 게 편했다. 누군가의 질문에 앵무새처럼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일일이 이 분야의 역사를 늘어놓지 않아도 되어서 안락했다. 그 안락한 침대에 친구가 볼링공 같은 말을 떨궜다. 영어 스터디에 나가보라는 권유였다.


"너도 영어 좋아하잖아. 펍처럼 맥주를 한잔 하며 대화하는 곳인데, 영어로만 말할 수 있어. 사람들도 엄청 많고 재밌다니까?"


봄이었고, 월요일 저녁이었다. 거리엔 온통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런 봄에 스터디를 가라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한강을 걷자고 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남자 둘이 걷긴 뭘 걷는단 말인가. 발길은 기어코 스터디로 향했다.

웃고 있었다. 내 웃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어색하고 낯설 줄 알았는데 꽤 재밌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대학생과 이야기를 했다가, 정장을 입고 나온 회사원과 이야기를 했다가, 열성적인 취준생과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별 내용이 없어도 시간은 기차처럼 줄줄이 지나쳤다. 그 안에 탄 사람들과 나도 모두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웃음이 생글한 그 여자를 만난 순간이었다. 눈부신 여자가 물었다.


"무슨 일을 하세요?"


글을 쓴다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뇌가 강력히 반발했다. '관심을 끌어, 이 멍청아'. 나보다도 먼저 반해버린 뇌 녀석이 격하게 소리쳤다. 어떻게 해서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더 궁금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니 지성과 관심을 겸비한 멋진 사내처럼 보일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했다. 관심을 끌라고? 여기서? 어떻게?


"천문대에서 별을 봅니다. 천문학을 전공했어요. 저는 제 일이 정말 좋아요."


목소리를 깔고 최대한 부드러운 남자처럼 말했다. 묻지도 않은 전공과 직업 만족도까지 공개하며 처절하지만 여유로운 듯 말했다. 이때껏 별을 본다고 말하면 쏟아질 질문을 귀찮아했으면서, 그 질문도 안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남정네가 된 것이다. 뒷 이야기지만, 나는 그날 하나를 물으면 열을 답하는 열성적인 답변 머신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천문학을 무기처럼 사용한 것은, 그러니까 잘 보이기 위해 한껏 감수성 풍부한 남자로 위장한 것은 결국 성공으로 끝났다. 그날의 분위기는 데이트로 이어졌다. 밤톨 같은 달이 벚꽃에 닿는 새벽까지 강변을 걸었다. 2년 전 낀 그녀와의 팔짱은 아직도 풀어지지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 설레는 걸음을 걷고 있다.

서른을 넘겨서야 믿는다. 세상에 안 좋기만 한 것은 없다고. 반복으로 얼룩진 물음도 윤기 나게 닦아주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고. 맑아진 유리창에 나와 그녀 그리고 행복이 차례대로 비추었다. 괜히 흠흠, 목을 두어 번 가다듬고 말해본다. 안녕하세요. 천문대에서 별을 봅니다. 저는 제 일이 정말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