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대 앞에는 맑은 천이 흐르고 있다. 비가 올 때마다 넘실 넘실 천문대를 위협한다. 이름도 강렬하다. 용암천. 때는 바야흐로 조선 성종 때. 갑작스레 화산이 터졌고, 흘러내린 용암을 따라 지금과 같은 물길이 생겼을 리 없다. 그냥 마을 이름이 용암리라서 용암천이다.
용암리는 워낙 시골 골짜기에 위치한 터라 마을 주민도, 시설도 별로 없지만 산 좋고 물 맑은 덕에 농장들은 많다. 블루베리, 딸기, 포도, 약초, 말 농장 등등 작은 농장들이 다채롭게 널려있다. 각각 농가들도 아이들 체험을 진행해서인지 유대가 좋다.
포도 농장에 손님이 와서 우연히 딸기 얘기라도 하면 "저쪽 아래 딸기 체험 농장도 있어요! 딸기가 아주 달고 맛있던데요?" 괜스레 추천한다. 딸기 집도 "블루베리를 따서 티라미수를 만들어 먹었더니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하며 손님에게 찡긋 추천을 날린다. 인심 좋고 마음 좋은 시골 마을의 전형적인 상생이랄까. 덕분에 찾은 손님도, 농장 주인도 더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번영회가 열렸다. 아이들 체험을 진행하는 사장님들끼리 모였는데, 나도 천문대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발전적인걸 해보자는 취지지만, 3년째 밥만 먹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로 위안하며 번영회는 회식만 번영했다.
그러던 하루, 산채비빔밥을 섞다 말고 도자기 사장님이 무심하게 물었다. "축제는 어때요?". 축제를 가자는 건지, 축제를 열자는 건지, 진행되고 있는 어떤 축제가 잘되고 있냐는 건지 말뜻을 몰라 눈치를 보고 있으니 한마디를 더했다. "사람들을 초대해서, 우리끼리 축제를 여는 거예요. 천문대는 망원경을 깔고, 딸기 농장은 딸기로 할 수 있는 체험 요리를 하고, 천연 염색 사장님은 염색 체험을 진행하는 거예요. 우리는 도자기를 빚게 하지 뭐. 사람들은 와서 이것저것 체험하며 놀고. 어때요?" 나는 망설이며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변 사장님들은 벌써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씩 받지요? 그냥 뭐 재료값만 받지 뭐, 우리 놀려고 하는 건데. 도자기는 흙값만 받을게요. 3000원. 딸기도 그럼 딸기값만 받죠 뭐 3000원. 에이 그럼 염색도 3000원만 받을게요. 천문대는 망원경 들고 오니까 좀 받아야 하지 않아? 네? 저희는 있는 거 들고 오는 건데요 뭐. 공짜! 가겠습니다.
축제는 그렇게 순식간에 결정됐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날짜가 잡혔다. 나비처럼 날아올라 벌처럼 축제를 마쳤다. 낙엽의 색으로 계절을 가늠하던 어느 가을이었다.
가만있어보자, 이게 얼마지. 얼떨결에 막내인 내가 총무를 맡았다. 다 끝나고 축제 경비를 결산해보니 손해만 40만 원이다. "체험은 어떠셨나요? 혹시 손해 보신 분도 계신가요?" 하고 묻자, 손이 파도를 타듯 주르륵 들렸다. 인건비는커녕 재료값도 안 나온 것이다. 이 정도 마이너스면 축제는 완전히 망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잘 먹던 밥값까지 내줬으니 망해도 폭삭 망했다. 만약 이게 회사의 프로젝트였다면 사장이 보고서를 내던지며 소리쳤을 것이다. "누구야! 진행한 사람 나와! 제정신이야?"
정적이 흘렀다. 고요했고, 엄숙했다. 회의장은 남극 어딘가에 던져진 것처럼 쌩하고 찬바람이 불었다. 그러다 가장 손해를 많이 본 천연 염색 사장님이 살얼음판에 발을 딛으며 말했다. "내년엔 두 번 하시죠? 손해가 나도 이거 뭐 재밌으니까 해야겠어요". 그 말에 도자기 사장님도 한 마디를 거든다. "그렇죠? 저만 재밌었던 건 아니죠? 아이들도 좋아하고 나도 즐거우니 일 년에 두 번 하시죠".
뭐지 이 이상한 전개는. 여기저기 두 번이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손해를 두 번 보겠다는 사장님들. 인건비를 두 번 버리겠다는 사람들. 회식으로 번영하는 것도 모자라 금전적 타격으로 융성하겠다는 번영회원님들의 말에 나는 말을 보태지 못했다.
아이들이 웃으며 찰흙을 만진 것에 만족한단다. 행복하며 웃었으니 딸기값이 안 나와도 된단다. 이 도시의 화폐가 아이들의 웃음은 아닐터인데, 어떻게 손해를 보자는 것일까. 계산이 맞지 않는 마음이 퍼진다. 조금씩 조금씩. 따스한 물에 떨군 잉크 같은 마음이 내게도 다가온다. 그런 마음 옆에 있으니 꼭 나도 마음인 것 같다. 부자가 된 느낌이다. 제가 말이죠, 돈 한 푼 안 받고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준 사람입니다. 으쓱.
용암리 번영회 총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평화롭게 결산을 마치고 나자 괜히 어깨가 올라갔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서 싱글 벙글인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정말 흥미로워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꼭 돈을 버는 일이 아니어도 즐기면서 하는 이들이 있다. 수십 년 동안 수학의 법칙을 증명하는 사람도,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히려는 사람도, 돈 대신 웃음을 받고 체험을 진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다. 부자가 아니어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광대뼈 근처가 불쑥 올라간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 마음 부자들이 옆에 있어서 따뜻하다.
내년에도 용암 체험 축제는 계속됩니다. 전폭 확대되어 연 2회! 손해 보는 축제 대작전이 열립니다. 돈 대신 웃음을 받아요. 그거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