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현 Jul 05. 2020

우주를 가뿐히 내려놓을 때

 아버지는 허리가 안 좋았다. 디스크가 몇 개나 터졌다. 하필이면 손에 흙을 묻히는 일을 하는 터라 힘쓸 일이 많았다. 

 게다가 키도 작았다. 158cm는 그 세대의 평균 키라며 큰 목소리를 내다가도 커다란 기름통을 옮길 때면 한숨을 먼저 쉬었다. 디스크 환자가 이길만한 철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요령이 좋았다. 가스통을 굴리는 배달부처럼 보일러를 굴렸다. 각진 기름통은 앞의 두 모서리를 이용하여 걸음마를 시키듯 옮겼다. 키가 작아도, 허리가 약해도 아버지는 일을 잘했다. 요령이 요술보다 나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요령이 없다. 요령이 없으니 성실하기라도 할 것처럼 판단하면 곤란하다. 나는 게으름은 잘 피우는데 꾀마저 부족한 인간이다. 사람을 상대할 때도, 일을 할 때도 느리고 마무리가 약했다.

 그래도 보고 자란 게 있는지 물건을 드는 일은 잘한다. 물론 유전자는 위대해서 나도 허리가 약했다. 힘도 없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무거운 포를 든다거나(포병입니다), 곡괭이를 다섯 자루씩 든다거나(포병도 육군이거든요), 완전군장을 메고 행군을 해도 어깨는 멀쩡했다(어깨만 멀쩡했어요). 요령껏 무게를 온몸으로 분산한 덕뿐이었다.


  망원경을 드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천문학 강사라면 망원경으로 별을 찾아내는 것에 으쓱대야 하지만, 나는 망원경을 드는 일을 더 잘한다. 20킬로그램쯤 되는 망원경을 쉽게 옮겼다. 삼각대의 두 다리를 꽉 쥐고 적당한 각도로 벌린 뒤 허벅지를 이용해 일어서면 솜털처럼 망원경이 들린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말했다.


"우와, 선생님 힘 진짜 세다! 망원경을 어떻게 그렇게 번쩍 들어서 옮겨요?"

"응? 그냥 옮긴 거지, 뭐 대단한 거라고~"

"그래도 선생님이 망원경을 빨리 가져온 덕분에 우주를 더 빨리 볼 수 있잖아요!"


 하하 그렇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망원경을 번쩍 들어 아이들 앞에 우주를 놓아주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말이 참 맛있었다. 요령이 요리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동료에게도 아이들의 말을 전했더니 동료가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답한다. 허허, 힘쓴 보람이 있구먼.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망원경을 번쩍 들어 옮기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산다. 보잘것없는 자부심이지만, 가끔은 그런 자부심도 필요한 법이다.

 빳빳하게 셔츠를 잘 다리는 당신도, 뽀득뽀득 설거지를 잘하는 당신도, 할인 카드를 쏙쏙 잘 챙기는 당신도 작은 요령이 주는 즐거움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고작 망원경을 내려놓는 것으로도 우주는 시작된다. 당신의 손끝에서 피어날 또 다른 우주를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승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