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현 Apr 30. 2022

망설여진다면, 식기 세척기

"잘 받아 적어, 결혼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결혼식장이나 예복 따위가 아니야. 바로 로봇 청소기와 건조기 그리고 식기 세척기야"


 나는 결혼을 앞둔 친구 S에게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친구는 전쟁을 앞둔 장수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무엇이든 외우겠다며 구구단처럼 외웠다.

"로봇 청소기, 건조기, 식기세척기"

"옳지"

"그런데 로봇 청소기는 편하고 건조기는 위생상 좋다고 치자. 식기세척기도 필수야?"

"당연하지"

"식기세척기는 깨끗하게 안된다던데, 말라 붙은 밥풀은 미리 한 번 손으로 닦기도 해야 한다며. 그럴 바엔 그냥 설거지를 하는 게 낫지 않나?"


 S에 말에 나는 혀를 끌끌 찼다. 과거의 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와이프가 식기세척기를 사야겠다고 말했을 때 한 치도 다름없이 말했다. "세척기 그거, 그릇 넣기도 귀찮고 세척도 잘 안된다던데... 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주말을 하루 앞둔 나는 잠에 들며 상쾌한 일요일을 꿈꾼다. 내가 꿈꾸는 주말이란 이런 것이다. 낮 12시쯤 일어나 맑은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행복한 기분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려먹는다. 정갈하게 보관된 냉동 크로플(크로와상+와플) 반죽을 와플 기계 넣어 굽는다. 그 위에 딸기와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얹어 브런치를 먹는 거다. 시작이 반이다. 피로와는 안녕하고 달콤하게 시작하는 주말은 해가 저물때까지도 달달하게 나를 세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보통 12시쯤 내가 가진 주름을 몽땅 이마에 전시하며  일어난다. 몸은 찌뿌둥하기만 한다.  밑엔 흑곰  마리가 앉아있다. 햇살은 없다. 암막 커튼을 쳐놨으니까. 부엌으로 나와도 다를  없다.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싱크대엔 설거지 거리들로 피사의 사탑이 세워져 있다. 높이는 롯데타워, 두께는 동대문 DDP 견줄만하다. 그곳엔 10 묵은 묵은지 냄새가 폴폴 난다.  장면을 마주한 순간 커피든, 크로플이든 먹고 싶지 않다. 그저 부엌이라는 공간을 외면하고 소파에 누워  TV 켜는 것이다. 그러니  주말을 망치는 범인은 분명 설거지다.

 도대체 설거지는 왜 이렇게 폭발하는 것일까. 먹은 건 한 끼인데 그릇은 왜 10개일까. 아무래도 늦은 밤 찬장에 있던 그릇을 누군가 몽땅 싱크대로 던져버리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식기세척기는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손으로 해야 더 뽀득뽀득할 거고, 그 커다란 식기세척기를 어디다 둘 것이며, 돈은 또 어디서 난 단말인가. 어머니는 식기 세척기 없이도 한평생 부엌을 깨끗하게 지켰다. 나도 그렇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식기세척기, 꼭 사야 할까?



블랙홀이 충돌하며 생기는 중력파의 상상도 (c)The SXS, R. Hurt

1990년, 미국과학재단은 '라이고 프로젝트'의 마지막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총 건설비용이 2억 1,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3천 억 원에 달하는 프로젝트였다. 미국 과학재단은 연방 정부로부터 이처럼 큰 규모의 단일 프로젝트의 예산을 승인받은 경험이 없었다.

 라이고 프로젝트의 목적은 '중력파'를 관측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 이론 중 하나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검증되었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이론의 부산물로 여겨지는 중력파는 발견되지 않아 유일한 미해결 증거로 남아있던 터였다. 중력파란 호수에 던져진 돌이 물결일 일으키며 퍼져나가듯, 질량을 가진 물체가 시공간을 일그러트리며 퍼져나가는 파동을 말한다. 중력파는 세기가 워낙 약하기 때문에 관측하기가 어렵다. 라이고 프로젝트를 통해 중력파가 발견된다면 천문학계에게는 그야말로 축제일 것이다.

 하지만 라이고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일부 천문학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과학재단이 이미 검증된 기술이 아닌 도박에 돈을 쏟아붓는다는 것이었다. 라이고 프로젝트에서 사용되는 관측기기는 기존에 사용되던 바 검출기가 아닌 레이저 간섭계를 이용한 방식이었고, 총건설비도 미국과학재단의 천문학 예산보다 2배나 많았다. 새로운 시도는 좋지만, 결국 돈은 돈대로 쓰고 성과는 없을지 모른다는 씁쓸한 비판이 쏟아졌다.

 천문학계는 고민에 빠졌다. 중력파 관측이라는 거대한 과학적 성과를 위해 불확실하게 담보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다행인 것은 와이스와 드레버, 킵 손과 같은 유수 천문학자들이 라이고의 원리인 대형 레이저 간섭계의 긍정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응원의 목소리도 과학계에서 속속들이 등장했다. 그 결과 여러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라이고 프로젝트는 최종 승인되었다.



◀︎Livingston에 위치한 LIGO 관측소 / 중력파 관측을 발표하는 LIGO 연구진▶︎
중력파를 관측했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2015년 9월 14일, 라이고 연구진은 중력파를 감지했다고 발표했다. 두 개의 블랙홀이 충돌하며 생긴 중력파였다. 다시 말하면 13억 전에 저 먼 우주에서 충돌한 두 블랙홀의 충돌의 파동을 관측해 낸 것이다. 이 중력파를 검출해 내려면 4광년 떨어진 별까지의 거리 재는데 머리카라 한 올의 굵기 차이도 구분해낼 수 있어야 했다. 라이고가 그런 정밀도를 가진 것이다. 2017년, 라이고 연구진은 중력파 검출의 공을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 상을 수상했다. 중력파를 예견했던 아인슈타인도 반대편 하늘에서 씨익 웃고 있었을 것이다.

  많은 반대에 부딪힌 라이고였지만 고집과 도전 그 중간쯤에서 학자들은 과학 진보에 성공했다. 만약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기존에 사용하던 기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라이고 프로젝트를 포기했다면 중력파의 검출은 다음 세대로 미뤄지지 않았을까?



 정확히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결국 나도 식기세척기를 샀다. 설거지의 품질을 걱정했지만 역시 진보된 기술은 훌륭했다. 내가 이어폰을 끼고 설렁설렁 손으로 한 설거지보다는 훨씬 깔끔했다. 그릇들이 구석구석 빈틈없이 닦였다. 식기 세척기를 돌리기 귀찮아 손으로 닦고 만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게는 '세탁기 돌리기가 귀찮아서 손빨래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릇들을 몽땅 안에 던져 넣고 알약 같은 세정제만 하나 넣어주면 끝이었다. 덕분에 설거지에 잠식당한 나의 주말은 간편하게 회복됐다.

 언젠가 PT선생님이 말했다. "몸이 변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변화시켜야 해요. 식단을 바꾸든, 운동 시간을 바꾸든, 운동 방식을 바꾸든 뭔가는 바뀌어야 결과가 바뀝니다." 나는 이 말을 감히 진리처럼 느낀다. 변화를 원하면 무언가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식기 세척기와 라이고를 보면 알 수 있다. 아, 물론 언제나 문제는 용기보단 지갑 사정이니 무리는 하지 않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장 난 미라클 모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