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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 상영중] 밀정(2016)

비스듬한 빛이 내릴 때

by 김태혁

대낮 정오의 하늘 아래에는 좀처럼 그림자가 머무를 거처가 없다. 수직으로 머리 위를 강타하는 빛은 너무도 강렬해서 암흑에게 작은 자리도 내주지 않는다. 사진을 찍을 때 빛이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하면 얼굴의 음영은 꼬리를 감춘다. 요컨대, 그림자는 비스듬한 빛이 내릴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어느 쪽으로든 빛이 조금이라도 기울어야 성립하는 그림자는
영화 <밀정> 속 위태로운 등장인물들을 바짝 미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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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똑바로 서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 생기는 것이 그림자라면, '밀정'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그림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방향과 형태가 시시각각 바뀌는 운명일 것이다. 밀정에 대한 두려움이 떠도는 가운데 인물들은 서로 설득하고, 회유하고, 배신하고, 협박한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결의와 확신에 찬 행동은 오히려 크게 의심받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를 완전히 신뢰하고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는가? 결국 궁지에 처한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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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간(反間, 역이용당하는 적의 간첩)의 속사정은 한층 복잡하다. 반간은 겉으로 원래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에 충성하면서 자신이 도와주고자 하는 조직을 위해 물밑 작업을 벌여야 한다. 반간의 경우, 자아가 분열되고 정신적 붕괴를 겪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판이다. 전광석화 같은 판단력, 임기응변, 눈치, 명배우에 버금가는 연기력,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어야 진짜 반간이지 않을까. 반간이 되는 이정출 역을 맡은 송강호는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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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은 선이고, 일제와 친일파는 악이라는 선명한 이분법은 분명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일제 치하 한반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그릇은 못 된다. 치열하게 갈등하며 양쪽 사이를 오갔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어느 쪽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았을 것이다. 영화 <밀정>은 그 이분법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상상하게 해준다. 의열단원들의 말쑥한 차림새처럼 우아한 이미지들은 살짝 맥이 풀리는 후반부의 전개를 만회한다. 영화관 영사기의 비스듬한 빛이 내릴 때, 김지운 감독의 스타일리시 시대극에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 영화 <밀정> 예고편

https://youtu.be/-dLJ_Wxx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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