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주인공은 없다
우리의 몸은 너무나 예민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머리카락 한 올만 건드려도 알아챈다. 대화 상대방의 흔들리는 눈빛만 보아도 진실과 거짓을 바로 판별할 만큼 우리의 마음은 섬세하다. 이렇게 민감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어쩌면 삶이란 매 순간 고통을 최소화하려 노력하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장 극단적으로 겪게 되는 전쟁은 모든 인간들이, 생명들이 가장 멀리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다.
전쟁광이 아니라면 누구도 전쟁을 체험하고 싶지 않겠지만,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다. 이유는 다양할 것 같다. 전쟁영화만큼 액션과 스펙터클에 적합한 장르도 없다. 우정, 사랑, 인류애 등 참화 속에서도 피어나는 숭고한 가치를 되뇔 수 있다. 스크린 속 처참한 세상과 달리 나는 지금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낄 수도 있다.
격조 높은 블록버스터 <다크 나이트> 시리즈, 꿈에 대한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였던 SF <인셉션>,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감동적이고 과학적인 SF <인터스텔라> 등 흥행력과 작품성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그가 전쟁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것도 전쟁사에서 가장 위대한 명장면으로 꼽히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영화화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관객들과 평단이 가졌던 기대는 실로 대단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관객들을 맞이한 영화 <덩케르크>는 전쟁영화 장르에서 별종의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영화 <덩케르크>)은 전쟁영화가 아니다."라는 놀란 감독의 말은 전쟁영화의 장르적 관습에서 벗어나겠다는 야심 찬 선언처럼 느껴진다. 영화 <덩케르크>에는 감정이입을 이끌 분명한 주인공이 없다. 전쟁의 참상이나 스펙터클을 극적으로 담아낸 장면이 희소하다. 전쟁터를 감동의 도가니를 바꾸어줄 전우애나 애타는 사랑이 없다. 그러다 보니 대사도 별로 없다. 흔히 전쟁영화에 기대하는 요소들을 비워낸 영화 <덩케르크>는 무엇이 대신 채웠을까?
놀란 감독은 "관객들이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진행되던 당시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연출 의도이자 로그라인이라면 <덩케르크>는 충실히 목적을 달성했다. <덩케르크>는 육해공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3개의 시점(時點)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플롯 대신 사건의 시간대를 절묘하게 중첩시키면서 되감는다. 시점(時點)만이 아니라 시점(視點)도 다양하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반복해서 볼 수 있게끔 촬영과 편집이 이루어졌다. 탈출 작전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아날로그시계의 초침 소리를 테마로 삼은 듯한 한스 짐머의 음악은 탁월한 영상에 맞춤옷처럼 딱 들어맞는다. 영화관 좌석에 편안히 앉아 있던 관객은 덩케르크로 던져진다. 지치고 배고픈 상태에서 간절히 영국행 배를 기다리는 병사의 곁으로.
덩케르크에서는 오직 생존만이 문제다. 병사들은 살기 위해 국적을 속이고,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바다에 빠진 자를 외면하기도 하고, 타인의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기도 하고, 배에 먼저 오르기 위해 새치기를 한다. 물론 극한의 상황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군인들도 등장하지만 그들은 관객의 눈물을 위해 소모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준다.
알려진 대로 덩케르크 탈출 작전을 성공시킨 일등 공신은 평범한 영국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이란 군에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이다."라는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의 격언을 가슴에 새기기라도 한 듯이 하나같이 덩케르크로 배를 몰았다. 그들의 이름 없는 헌신이 주는 감동은 미풍이 부는 바다의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에 와 닿는다. 전쟁에 소수의 주인공은 없다. 수많은 영웅들이 있을 뿐이다.